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9월18일 야곱의 우물- 루카9,23-26/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8 조회수498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23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의 선조,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은 전(前)문맥인 첫 번째 수난예고(22절)와 후(後)문맥인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 사이에 위치하여 추종의 의미를 더욱 확고하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보편적인 초대입니다.(23절) 성경에서 ‘따라간다’는 것은 제자 됨, 곧 예수님의 삶과 사명과 운명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추종은 명백한 의지와 더불어 행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23ㄴ절) 이는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복음이 우리 존재와 생명을 초월하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종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추종을 방해하는 자아를 포기하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할 때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지상의 가치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려 얻고자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마태 13,44­46 참조)
 
둘째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수행입니다.(23ㄴ절)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선택의 여지 없이 질 수밖에 없는 삶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기껍게 고통을 인내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모든 이에게 고통일 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인생의 장애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거부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실존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극복할 수밖에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들여 묵묵히 지고 갈 때 십자가는 참된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도구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로서의 수행은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며”(시편 1,2) 날마다 주어지는 자신의 십자가를 봉헌하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루카 9,24) 투신을 통해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일상 안에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교란시키고 결단에 장애를 초래하는 지상의 가치들이 있습니다. 곧 부귀·권세·명예·학벌·인맥·성공 등의 지상 가치는 명백한 목표를 제시하며 기쁨과 보람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투신하게 되는 가치, 곧 자아 포기, 헌신적인 십자가의 희생(23ㄴ절), 나눔(루카 18,22; 사도 4,34­35), 무한한 용서(마태 18,22), 이웃 사랑(루카 10,27. 29­37) 등은 신앙 안에서 빛을 발하며 보이지 않게 다가섭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투신의 향방을 제시하지만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8)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루카 9,25) 사도 바오로께서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4)
 
그러나 ‘예수님과 그 말’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그 가치에 대한 미온적 자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머문 자리에서 예수님께 드린 불명료한 신뢰와 사랑은 그분이 오시는 영광의 날에 우리를 부끄러움으로 몰아세울 것입니다.(루카 9,26)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내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드리지 못했던 우리 사랑이 너무 작고 초라한 탓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예고와 거룩한 변모를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려주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 곧 그분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묵상(Meditatio)
‘내 뒤를 따라오려면’ 하는 추종의 전제 조건은 그 중심점이 ‘예수님과 그 말씀’에 있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중심점은 무엇인지를 성찰해 봅니다. ‘저 자신을 버리겠지만 그러나…. 제 십자가를 지는데 그러나…. 제 목숨을 바치겠는데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그러나’로 가르며 예수님의 길을 비켜서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오직 한마음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던 신앙 선조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세상의 가치, 세상의 잣대가 없었을까요? 인간적 기대를 접고 고통을 감수하며 죽음 앞에서조차 웃음 지었던 순교자들, 이 땅의 후손들 안에서 다시 피어나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그분들의 신앙을, 오늘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로마 8,31­39 참조)

기도(Oratio)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 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시편 125,1)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