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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2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0 조회수31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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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는 늘 착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의로운 사람이길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노력이 때때로 사람을 판단하여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곤 합니다. 내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기준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놓고 판단하고 나누는 일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기준은 죄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어서 그 판단의 결과에 따라 사람을 대하시는 것은 하느님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름의 기준에 부족한 사람을 이미 우리 안에서 죄인이나 악인으로 만들고 하느님 이전에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여 벌을 주는 셈으로 회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이 부각되는 듯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숙이지만 이미 자신의 꿇어진 발 밑에 수많은 이들의 잘못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 위에 자신이 서 있음이 하느님 보시기에 자랑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느님은 어떠실가요?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있는 것만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겸손함이 가치야 존중될테지만 만약 그것이 하느님 앞에서만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을 하느님 보다 먼저 심판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닦고 만족한 삶을 살았다면 하느님은 그가 사람들 위에 서 있음을 모두 보시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입을 열어 남에 대해 말할 때 이미 그들의 삶의 기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세리를 부르십니다. 모두가 아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의 절차를 밟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일하는 세관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죄인을 예수님은 부르십니다. 남들이 모르는 죄를 지은 이가 아니라 공개된 죄인을 당신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이 일이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 없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죄인인 제자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낳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과 세리들이 있습니다.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하는 이들, 위험하고 거칠고 지저분하기까지 한 이들 곁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선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착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모습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의인과 선인에게 맞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착하고 의로움은 악하고 죄가 있는 곳에도 물들지 않고 오히려 악한 것을 다스려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이렇듯 착하고 의로움은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표현되고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착한 것 사이에 더 착한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이들만 있는 곳에서 의롭다는 말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모두가 착하고 의로움을 꿈꾸는 세상, 곧 하늘나라를 그린다는 것은 죄와 악함이 있는 곳을 피해 달아나거나 그것을 심판하고 벌을 주어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구하고자 하심을 깨닫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능력 곧 사랑으로 그 상황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주변에 죄인이 많은 것은 죄인의 구원이라는 특별한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함께 계셨기에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 참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되며, 의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과 의로움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빈약한 자신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곁에 선 공개된 죄인들은 오히려 그 선명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더 분명히 받는 은총의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명한 죄인들을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사랑하시며 끌어 안으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죄인들에게 냉혹한 시선을 보내거나 죄에 떨어진 이들을 가차없이 공동체에서 배제시키거나 마음에서 제외시키는 행동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이해하시며 세워놓으신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늘 죄인으로 주님 곁에서 그리고 사람들 곁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고해소의 문이 늘 열려있는 이유입니다. 고해소에서 고해가 사람의 죄를 숨겨 하느님만 아시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며 사람과 하느님께 자신의 죄스러움을 고백하고 세상과 하느님과 화해를 시도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께만 받는 은밀한 용서가 아니기에 하느님께만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죄를 기준으로는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 속에 주님 곁에 서 있는 죄인들을 이상하다 생각하는 이들이 주님께 얼마나 멀리 있는지 생각해보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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