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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실천하지 않는 믿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4 조회수645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6주일 - 실천하지 않는 믿음

 


 

제가 보좌신부를 할 때 세례식을 통하여 한 자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70대 할머니셨습니다.

그 분은 전직 산부인과 의사셨습니다. 처음엔 낙태도 많이 하시고 그렇게 돈도 많이 버셨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 될 땐 하루에도 60명을 낙태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을 받은 것인지 얼굴 반쪽이 마비되어 비뚤어지는 병에 걸리셨습니다. 도도하던 그 자매님은 점점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졌고 은퇴 후엔 그렇게 집에 갇혀 살게 되셨습니다. 움직이지 않다보니 다리에도 병이 생겨 걸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지내던 중, 아래 층 한 교우 자매님이 위층 집에 전교를 왔고, 이런저런 모든 사정을 들은 그 신자 분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분께 몸의 건강보다도 먼저 필요했던 것은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음을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움직일 수 없는 그 분께 개인적으로 교리를 해 주셨고, 그 분도 워낙 열심히 공부를 하셔서 곧 있을 세례식 때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례식 때 휠체어에 앉아 있는 분만 찾았는데 그 분은 다른 세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걸어 나와서 모든 세례 예식을 받았습니다.

저야 세례를 준 것밖에 없는데 그 분은 저를 참으로 아버지처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습니다. 그런 분은 처음 봤습니다.

한 번은 체중이 다리를 더 안 좋게 하는 것 같아서 제가 물을 마시지 않고 건식 식사를 할 때 갑자기 살이 많이 빠졌던 것이 생각나 물을 마시지 말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약간은 재미삼아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 수분이 줄어들어 저항력이 세져서 잔병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고 이런 저런 이론을 펼치며 권고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그 할머니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제 이야기를 믿고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다가 탈수증으로 쓰러지셔서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 가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물을 한 방울도 안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분이 이런 분이시기에 저는 무엇이든 시킬 수 있었습니다. 갓 세례 받으시고 몸도 안 좋으신 분께 저는 성경필사를 권유했습니다. 오래 앉아계시지도 못하고 눈도 안 좋으신 그 분은 18개월 만에 신구약 성경을 모두 필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 다시 커다란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던 당신의 외아들이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입니다.

저는 오래된 신자였던 한 부부가 똑같은 일로 성당에 다니지 않겠다고 하여 찾아가서 달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자매님도 신앙을 가진 지가 얼마 안 되어 이것을 잘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정신을 잃기도 하고 또 매일을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단 한 번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고 지금은 예전의 목소리를 회복하시어 하늘나라 가서 빨리 아들을 만나 볼 희망에 차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을 생각하면 오늘 복음말씀이 생각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맏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이고 둘째 아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법을 지키며 하느님을 말씀을 따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따르지 않았고, 이방인들은 처음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신앙을 지닌 기간이 얼마가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얼마만큼 믿고 실천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실천의 문제를 생각할 때,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은 오히려 가톨릭 신자들보다 개신교 신자들이 하느님 법을 더 잘 믿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안식일 법과 십일조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 30)라고 명시되어 있고, 예수님 또한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마태 23, 23)이라고 하시며 십일조는 하느님의 법률임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세우신 교회가 그 법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본래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렘의 왕인 멜키세덱에게 자신이 찾아온 재물의 십분의 일을 바친 데 기인합니다. 멜키세덱은 대사제로서 십분의 일을 받고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며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십사 기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제가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의 상징입니다.

십일조는 바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카인과 아벨에게서 보듯이 재물을 바칠 때는 ‘감사’의 마음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렇게 신자들의 ‘감사’는 ‘십일조’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느님은 그 감사의 제물을 ‘생명의 빵과 포도주’로 변화시키며 감사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가 없으면 감사의 봉헌이 없으니 성찬의 의미도 퇴색하게 됩니다. 성찬의 은혜가 모두에게 똑같이 내리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감사하는 만큼 그 공간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바치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은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지만 하도 믿지 않으니 시험해 보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를 약탈하고 있으니 저주를 받으리라.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너희가 그러면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바로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말라 3, 8-12)

십일조를 못 내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면 집이 더 궁핍해 질 것이다.’라는 인간적인 계산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의 제자들과 같은 인간적인 계산이 믿음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빵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바친 과부는 결국 굶어 죽었을까요? 사렙다의 과부처럼 그 뒤주에 쌀이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성경 말씀대로 시험이나 한 번 해 봅시다. 단 한 번도 시험해 보지 않고 죽는다면 하늘나라 가서도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미국의 어떤 신부님도 모든 신자들이 십일조를 내게 하였습니다. 물론 반감이 있을까봐 내 보고 돈이 부족하게 되면 다시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도 자신들이 낸 돈을 다시 요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전화가 와서 “이상하게 돈이 부족해야 하는데 몇 년 동안 갚지 못하던 빚도 갚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톰 케인이라는 사람은 일간지에 이런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정직하게 봉헌하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그 십일조를 통하여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는 증거를 대는 사람에게는 일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만여 통의 편지가 왔는데 하나같이 다 축복받았다는 내용이고, 일만 달러를 타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우리보다 늦게 시작한 이들이 하느님의 법을 더 잘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도 회개하거나 믿지 못하여 오히려 둘째 아들 꼴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을 천주교에서는 단 한 성당도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한다고 했으면서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잘못된 신앙 중 가장 먼저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실천할 의지가 없다면 오늘 복음도 우리에겐 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버리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수입이 들어오는 대로 그 십분의 일을 바로바로 떼어서 주님을 위한 봉헌의 바구니에 담아놓는 습관을 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실천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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