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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3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30 조회수303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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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오늘 복음에 불행하다는 선언을 받은 도시들이 등장합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도시에 대해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두 도시가 예수님께는 수많은 기적을 이루셨던 도시였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예수님이 그들을 얼마나 구원하시려 했는지를 더욱 간절히 보여주는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점점 평범한 일상보다는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가르침의 정의를 긍정을 하지만 현실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기적 앞에서는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주님에게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기적은 은총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면이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하실 때, 그저 보여주시기 위해 베푸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도시들은 죄인들과 병든 이들이 많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기적의 수효만큼이나 이 도시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은총이 넘쳐났다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은 곳이란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낳은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그만큼 많아졌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겁니다. 그리고 이 기적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격을 말하고 있어서 그만큼 그들이 하느님의 능력과 모습을 가까이 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숱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변화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은총과 하느님 사랑이 넘치는 곳이 가장 절망적인 선언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은총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결과 외에 정확한 이유를 예수님께 들을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을 당신과 같은 가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능력의 기준으로 대했을 때 제자들은 분명 부족함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진리의 가르침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유명세조차 예수님보다 못했을테니 그들의 이야기는 예수님 보다 더 보통의 사람에 가까웠을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제자들이 물리침을 당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들 도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도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한 태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하느님의 사랑과 가르침이 아닌 예수님 개인의 능력으로 대하고 그 기적이 담고 있는 사랑이 아닌 자신이 그 능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가 궁금한 이기적인 눈요기로 예수님을 대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느님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속에 이 도시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이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라면 우리는 주님의 기적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분 손끝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읽고 우리의 태도는 주님을 기다리는 태도에서 주님처럼 살아가려는 모습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열광하는 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처럼 다가가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인정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차이로 사람을 가르치는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사람들을 희망을 지니게 하고 하느님 안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 기적의 이유요 내용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능력과 내 한계를 뛰어넘는 부러움의 초월의 개념을 통해 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와 찬양으로 공경하고 열광하면서도 내 삶은 늘 한계에 머물러 있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해 주신다고 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나 아니면 불가능한 내 삶의 모든 변화들을 안된다고 말하고 주님이 얻고 싶은 결과만을 가져다 주실거라 말하고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무수한 기적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에 몰려든 사람들, 예수님을 찾아 다니는 그들의 분주한 발걸음들은 분명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들의 마음에 하느님이 담길 수 있는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런 이들의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모여 하느님을 말할 때는 모두가 한결같은 찬양을 하지만 삶에서는 더 없이 비교하고 시샘하며 우울해하고 좌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하느님을 알아서 더 추하고 모진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받은 것이 많고, 본 것도, 아는 것도 많다고, 또한 자신은 하느님께 잘했다 말한다 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 것이라 말하는 것은 오판입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 카파르나움 이 도시들은 누구보다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은 도시들입니다. 하느님으로 치장된 그 화려함 속에 주님의 안타까움을 만들어냈던 그들의 무지함과 고집센 이기심을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구하시고 세상을 구하시려던 주님의 그 바쁜 손길과 마음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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