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7주일. 2011년 10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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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9-30 | 조회수39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7주일. 2011년 10월 2일.
마태 21, 33-43. 이사 5, 1-7. 필립 4, 6-9.
오늘 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포도밭 소작인에 비유하였습니다. 포도밭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읽은 대로 이사야서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포도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도 이사야서(5, 2)를 인용한 표현입니다. 소작인들이 그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서 소작인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밭의 임자인 하느님의 아들, 곧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끝에 시편(118, 22-23)을 인용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에게 악하게 행동한 소작인들과 같이,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잃었고, 그들이 버린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고 자각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 후에 즉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유대교와 결별한 것은 점차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인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억으로 유대교의 경전(經典)인 구약성서를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 봉헌에 대해서도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견해를 달리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 기원 후 66년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4년 동안 치른 전쟁은 70년에 이스라엘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마르 13, 2) 파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폐허로 변한 성전과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들의 신앙공동체가 새 이스라엘이라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말씀하고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역사 안에 태어나서 살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역사는 살아 움직입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감수성도 다릅니다. 그 변화를 외면하고, 과거에 발생한 원칙이나 제도를 절대화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을 자각한 것은 동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실을 시대적 감수성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탈출 33, 19)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유대교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리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감수성으로 시대적 징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축복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 혹은 그분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도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남긴 말만 반복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들리는 하느님에 대한 말이라야 합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이 유럽 중세에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람노릇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 말만 반복하면, 타문화 혹은 타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매도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다(多)문화, 다종교 사회입니다. 교회 밖에도 문화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깊이 있게 깨달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 하느님을 왜곡하는 독선이 됩니다. 그런 말은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배타심을 배설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진 여러 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것만 고집하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비난하였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과거의 해석에 집착하여 그것만을 고집한 나머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과거와 같이 신분 따라 인간의 실효성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보를 받아 소신껏, 자유로이, 실천하며 자기를 실현합니다. 오늘은 어느 집단에서나 제도와 조직이 경직되면, 사람들의 실효성이 저하됩니다. 기업들은 계장, 과장, 국장이라는 경직된 직위 중심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사안 별로 팀을 만들어 팀장을 중심으로 효율성 높은 경영을 합니다. 창의력이 인간의 존엄성으로 보이는 오늘입니다. 명령과 복종은 창의력을 저하시킵니다.
교회는 현대인을 위해 과거의 신앙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신분 중심의 경직된 제도는 개선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직무를 위해서도 임기는 있어야 합니다. 교회 직무를 위한 남녀 성차별도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혼이 급증하는 오늘의 사회입니다. 이혼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이 감싸주는 교회라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함께 자유로이 토의하고 결정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효성 있게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오늘을 위해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소출을 잘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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