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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0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02 조회수32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2일 연중 제 27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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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 세상을 다스리게 하신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그 다스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삶의 근본이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깨달아야 하고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내용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사람인 우리에게 이 창조에 대한 가르침은 가장 중요한 내용이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을 꺼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서 말한 그들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는 이 소작인이 아니냐?'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근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내용의 출발점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소작인들이 포도철에 주인에게 내 놓을 몫이란 자신의 일과 삶에 근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 밭의 근본을 이루는 일에 대한 보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닮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결실을 보고자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사랑의 세상의 모습을 하느님께로 돌려드려야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이 소작인들의 바뀐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 포도원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고 만들려 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잔악하게 끝까지 그들을 믿어주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모습으로 소작인들은 등장합니다. 어렵지 않게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 만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에도 한편으로 계속 반복되고 일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로 계속 전해져야 할 듯 싶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왔고, 그 뜻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야하지만, 사람들은 그 근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또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못하는 모습입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냥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창조의 이야기를 자신들을 위해 달리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점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고, 세상을 다스리라 맡기셨다는 내용을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는 것에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 섬긴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느님은 예물과 정성으로 아주 멀리 계시게 하고는 세상에서는 완전한 주권을 가진 절대자의 위치에 서려는 시도를 하곤 합니다.

물론 눈으로 읽는 책에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교리에도 하느님의 절대적인 가치는 담겨져 있지만 우리에게 하느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만 하시는 분처럼, 그래서 대단하고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결국 그런 일이 우리 인생에 전반에 일어나지 않는 만큼 우리에게선 멀리 계신 분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분이어서 오히려 우리 삶의 고난과 고통과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분처럼 되었습니다.

'계시기는 하되 우리와 상관 없는 분'처럼 하느님은 그렇게 멀리 계십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할만큼 멀고 희박한 확률의 기적의 주인공이 하느님이 되신 셈입니다.


반면 그런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이야기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닮았다는 의미 이외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닮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느님이 인정하셨다는 식의 권력의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대신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에 대해서는 현실과 다르다, 시대가 아니다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대화하면서 마치 불가능한 미지의 세상처럼 만들어 버리고 자신이 구성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한계처럼 미화하고 인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미 자신은 하느님과 관계 없이 하느님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단지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 등으로 밀어버리고 겸손한 듯 고개를 조아려주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고개를 돌려 세상에는 가장 근엄하고 무서운 얼굴로 자신의 생각과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양 윽박지르고 지시하고 명령하며 높은 자리에 서서 세상을 호령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늘 다가오셔서 충고하시고 격려하시며 믿어 주십니다. 수많은 판관과 예언자들이 그렇게 사람들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힘을 지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까지 그들을 박해하고 쫓아냈습니다.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주인처럼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오실 결심을 하십니다. 소작인들의 변해버린 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선택한 이들에 대한 최선의 희망을 품으십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결국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립니다. 주인의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소작인들은 이제 그 밭이 자신들의 것이되었다 여겼을 것이며 주인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경계하고 한 편으론 두려워하며 그 밭의 소출로 배를 채웠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전해도 배는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여전히 뒷 배경으로 삼으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 포도밭의 주인의 이름을 간직하면 보호받을 수 있고 대신 욕심도 채울 수 있습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그 포도밭의 주인이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 말하게 되고 그것으로 더 큰 욕심도 채울 수 있겠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 결국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는 싫어할 겁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방패로 삼아 말하던 주인의 무서운 징벌을 직접 받으며 이를 갈듯 억울해하며 영원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주인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꺽지 않을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은 사랑이며 우리가 그분을 닮은 것은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 애쓰지 마십시오. 모든 잘못이 그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돌려세우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힘으로 누르는 무서운 절대자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변할리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위안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욕심에 빠져드는 소작인들의 만행 역시 계속된다는 것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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