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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피해주지 않는 사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02 조회수650 추천수8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7주간 월요일 - 피해주지 않는 사람?

 


 

공동체에서 어떤 일을 맡기기 위해 청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자신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며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일까요?

 

1964년 3월, 광기 어린 충동에 사로잡힌 채 뉴욕의 새벽 거리에서 사냥감을 찾던 살인마 모즐리의 눈에 띈 28세 여성 키티 제노비스. 살인마는 그녀의 등에 칼을 꽂고, 비명을 질러대며 반항하는 그녀와 격투를 벌입니다. 길 건너에서 그 처절한 울부짖음을 듣고 창 너머로 바라 본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난 제노비스는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지만 다시 되돌아 온 살인마는 이웃 주민의 비겁과 방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30분 넘게 제노비스의 온 몸을 칼로 난도질하고 성폭행한 뒤 유린했습니다.

‘제노비스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회에 인간의 ‘무책임한 방관자로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심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모델로 삼아 ‘책임의 분산 효과’ ‘방관자 증후군’ 등의 신개념과 이론을 쏟아냈습니다.

 2003년 8월 영국 리버풀. 쇼핑몰에서 잠시 엄마 손을 놓친 4살 제임스 벌져군이 두 명의 10대 소년에게 끌려 매를 맞아가며 4㎞를 이동하는 동안 이들과 마주쳐 위험을 느낀 38명의 어른들 중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임스는 참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제노비스 사건 38명의 목격자’가 ‘리버풀 38인’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2009년 6월 4일 오후 8시, 적지 않은 행인과 영업 중인 가게가 밀집한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서 심부름 다녀오던 10살 초등학생이 승합차에 살짝 부딪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는 바로 일어나 울며 집 쪽으로 달려갔고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아이를 뒤쫓아 갔습니다. 아이를 잡은 40대 운전자는 아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차로 데려와 태우고는 출발했습니다. 커다란 급제동 소리가 주의를 끌어 여러 명의 행인과 상인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지만, 누구도 나서 제지하거나 아이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는 온몸에 공기총을 맞아 참혹하게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상태에서 다시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자 신고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벌인 참극이었습니다.

(표창원, 중앙일보 뉴스 [2011, 4, 24], ‘28세 그녀가 죽어갈 때 38명은 어떻게 외면했나’)

 

저도 오토바이를 타다가 옆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부딪혀 넘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4명의 건장한 불량배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저에게 차의 찌그러진 곳을 고치도록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 주위에 있던 분들이 모두 달려와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처음엔 왜 남의 일에 참견 하냐고 소리 지르다가 사람이 많이 몰리자 그냥 차를 다시 타고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어도 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폭행당하는 사람을 방관하고 그냥 지나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웃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배 위에서 잘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문에 주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는 겉으로는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기에 하느님께 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웃에게도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도 사제와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봉사를 해야 하기에 피 흘리며 쓰러져있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지나칩니다. 물론 그들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지 찾지 말고 내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피해를 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도 응당 주위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야합니다. 부정의가 벌어지면 당연히 바로잡으려 해야 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이미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Panis Angelicus - Luciano Pavarotti>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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