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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0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03 조회수41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3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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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익숙한 부분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이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시면서 등장합니다. 참 이웃이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가 도리어 답을 하게 만드시는 예수님의 지혜 속에 우리가 나누는 이웃이라는 기준이 하느님 앞에서의 이웃의 기준과 다를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되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이가 바로 이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원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궁금함에서 출발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해 물었고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되물으시면서 바로 그것이 그 열쇠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가 알고 있는 것에 동의해 주시자 율법학자는 말을 이어가면서 이웃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웃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영원한 생명의 열쇠가 되는 율법의 정신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부분에 대해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것은 자신이 율법학자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간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이 두 문장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하느님 사랑은 안심하고 이웃 사랑에 대해물었지만 결국 이 이웃 사랑의 기준과 내용이 잘못되면 하느님 사랑에 있어서 기본이 무너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마음과 목숨과 힘은 다름 아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의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두 가지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인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하느님의 대전에서 일을 하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께 정성을 다하고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말을 들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성전에서 일하는 그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듣는 순간 누구나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착한 교과서와 같은 이야기여서 더 이상의 묵상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이 그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 만으로 그들의 행동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다는 말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사랑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 사람의 마음과 목숨과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일까요? 하느님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물론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사랑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하느님을 그중 우선 순위를 가진 질투의 화신으로 만드는 일을 하며 사랑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이웃에 대해 묻고 있는 율법학자와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려는 의도보다는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오히려 보여주시려는 뜻이 더 깊은 듯 보입니다.


하느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우선 순위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몸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일 겁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사람과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이미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순간에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고 계신 분이시기라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뒤늦고 작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하느님이라는 단어 앞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내 삶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모든 장면들이 됩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과 생명과 힘을 통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정확히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우리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 이상을 얻을 수 없는 우리입니다. 이웃의 기준에서 사마리아가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착함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 하나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고, 그의 생명을 아끼며, 그가 가진 것으로 그를 살려내는 장면을 봅니다.


잘 보이십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리는 이의 모습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도 당신의 입으로 율법학자의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았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바로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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