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06 | |||
---|---|---|---|---|
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10-06 | 조회수29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계시지만 복음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방향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기도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비유를 봅시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의 내용을 기도의 가르침으로 바꾸면 빵을 가진 친구는 기도를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 빵을 달라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의 노력 덕분에 결국 이 벗은 빵을 내어 줄 것이라고 예수님은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집요하게 매달리는 기도의 끈질김에 대해 배우곤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지니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 걱정하지 말고 더 기쁘게 기도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빵을 빌리는 사람에게 이 빵은 그렇게 절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집스럽게 이 친구를 찾아가 귀찮게 졸라댈 이유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빵이 빌리는 이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배가 고픈 것이 아닌데 이 사람은 친구에게 줄 빵을 얻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냥 친구를 위해 애를 쓰는 이의 이야기라 아름답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더 절실할 수 있는 이야기 대신에 친구를 위해 애를 쓰는 친구를 비유의 주인공으로 삼으셨을까요? 오히려 자신이나 가족의 이야기라면 더 강조될 수 있는 이야기였을텐데 말입니다.
복음 속의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이가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애타게 매달리는 이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 애를 쓰는 안타까운 사연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집스레 벗을 찾아가 벗으로서가 아니라 사정을 비는 종의 모습처럼 비굴하게 되어 바라던 바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빵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주어지겠지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비유의 사람은 자신을 위해 기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왠지모를 생각이 이야기 끝에 남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론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묵상거리를 던져 주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얻습니다. 행복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고, 또한 의심이나 불안함이 아닌 사랑하는 아버지이기에 그 기도 자체가 이미 이루어진 듯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께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는 결문으로 말을 맺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거의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하느님의 뜻이요, 진리요, 영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원리가 되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의지와 뜻 자체이십니다.
우리 뜻, 우리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바람과 의지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라 대답하신 셈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설마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런지요.
결국 복음 속에서 얻어낸 빵이 그러하듯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얻어낼 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그 대화로서의 기도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는 시간이고, 또한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기도에 대해 잘 아시는 예수님, 그분이 말씀하신 이 기도의 방법을 다시 새겨 봅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 기도를 누구보다 잘 드리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을 겁니다. 그분이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셨을까요? 우리는 그분이 청하신 것이 우리를 죄와 힘겨운 삶에서 구해주시는 사랑이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늘 찾으셨던 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닮은 모습, 곧 사랑이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열고자 하셨던 그 문이 바로 하늘 나라의 문이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얻으셨던 그 모든 것을 청하여 우리가 받은 것을 '용서'이고, 그분이 찾으시고 우리가 얻은 것이 '구원'이며, 그분이 두드리고 우리에게 열린 것이 '하늘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를 위해 그토록 청하고, 찾고, 두드려 얻은 그 빵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으신 아버지에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과 늘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시고 함께 하셨던 성령의 은혜는 그렇게 우리에게 기도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