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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물유본말 사유종시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3 조회수1,147 추천수1 반대(0) 신고
 
 
 
물유본말 사유종시 - 윤경재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루카 11,47-54)
 
 
 
얼마 전에 집사람이 성지순례를 떠나 10여 일간 주부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이 설어 어색했지만, 그런 중에도 주부 일을 배우고 이해하는 즐거움이 생겨 좋았습니다. 집안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은 어지럽히는 사람이 적어 격일로 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밥 차려 먹고 설거지 하는 일은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지라 매일 출근 하는 제게 부담이었습니다. 하루라도 설거지를 빼먹으면 싱크대에 수북이 쌓이는 그릇 때문에 금세 표가 나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불편해졌습니다. 게으른 자신을 광고하는 듯했습니다.
 
설거지는 그릇을 깨끗이 닦는 일도 중요하지만, 잘 말리고 그것을 정리하여 제자리에 넣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씻은 그릇들을 본래 위치에 갖다 두어야 새로 설거지를 시작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사서삼경 중에 하나인 대학(大學) 1장에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道에 이르려면 선후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후를 아는 방법으로 物에는 本末이 있고 事에는 終始가 있다는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근본(本)과 지엽적인 것(末)은 제 순서대로 말씀하시나 終始에서는 끝마무리가 먼저 나오고 시작이 나중이라는 순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시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순서에 있어서 物과 事의 차이를 구별하여 말씀하신 진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무리를 먼저 말하고 시작을 나중으로 돌려 말씀하신 것을 대구법을 사용한 현란한 글 솜씨쯤으로 여기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物은 인간의 일이 아닌 하늘이 만든 것으로서 생명체나 물질을 의미합니다. 즉 창조물을 말합니다. 事는 인간이 지구상에서 생활함으로써 이루어진 일들, 즉 업적이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지은 物을 살필 때에는 그 순서를 本을 먼저 살피고 나서야 末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유와 원리를 먼저 깨달아서 그 根本대로 온갖 상황에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서 형성된 모든 일에는 그 순서가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무리를 짓고 나서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거지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는 먼저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릇들을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지 않으면 주방은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정리하지 않고 새로 끼니를 차리려면 그릇이 쓸데없이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끝을 보아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진리가 사유종시(社有終始) 안에 담겨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생겨난 근본정신과 그 적용을 살피고 인간이 이를 일에는 종말의 시각으로 절실하게 시작하여 선후를 살펴 아는 것이 도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대학은 가르칩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유종시 하지 못하여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마무리 짓지 않고 감추기에 급급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유다인도 그랬습니다.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적당히 꾸며 어물쩍 넘기려 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했던 근본정신을 다시금 돌이키고 자기 시대에 합당한 방법으로 적용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가림으로 예언자들의 무덤이나 새로 꾸미고 회칠이나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조상들이 범한 죄가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예언자의 정신을 관광 상품쯤으로 여긴 것입니다.
 
복음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은 그저 관광 상품꺼리나 새로 짓지 말고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예언자들의 근본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요구이었습니다. ‘물유본말 사유종시’라는 도의 원칙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에서 끝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시작이 있다는 진리는 대학이라는 경서에만 담긴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여러 말씀도 종말에 관한 시각을 염두에 둘 때 그 의미가 절박하게 가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재판을 조르는 과부의 모습도, 산이 바다에 심어질 거라는 믿음의 말씀도 종말을 바라보는 전망에서는 그리 이루기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종말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삶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오는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길을 갈 것인지 아닌지는 이제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어려운 길이 아니라 어쩌면 가정주부가 설거지를 하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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