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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4 조회수864 추천수2 반대(0) 신고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다. (2열왕1,1-19)

 사람에게 생기는 악성 피부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사제는 살갗에 생긴 병을 살펴보는데, 병든 자리의 털이 희어지고, 그 자리가 다른 살갗보다 우묵하게 들어가 보이면, 그것은 악성 피부병이다. 사제는 그것을 살펴본 뒤,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찟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레위13,1-3.45-46)

 이와 같이 유다인들은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하고 공동체에서 쫓아 냈습니다. 공동체가 그를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서 살게 했다는 것은 곧 그를 돌보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그에게는 더 이상 치유의 희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겠는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나누려는 나아만의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공동체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아람인들은 나병 환자를 공동체에서 쫓아 내지 않고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함께 살았으므로 치유의 기회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런지요. 나병 환자를 군대의 장수로 쓰면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아람 임금의 마음씨에 주님께서는 승리를 안겨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병 환자를 공동체에서 쫓아낸 유다인들과는 달리 그가 나병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군대의 장수로 쓰면서 아끼고 사랑해준 아람 임금을 통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셨을까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느 날 깜짝 놀랐습니다.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아니, 이 소녀에게 나아만은 원수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땅에 약탈하러 왔다가 사로잡아다 자기 아내 곁에 딸로 삼은 것도 아니고, 종으로 부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 원수가 나병이 치유되기를 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나아만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나아만은 어떤 사람인가?

나아만은 나병 환자이지만 위로는 임금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부인과의 관계도 좋고, 자기가 거느리는 부하들은 그를 '아버님'이라며 따르고,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 온 어린 소녀가 그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병에서 치유되도록 길을 가르쳐 줄 정도로 인간 관계가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나병이 있다는 것은 한 가지 병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병을 말할 때는 이중적인 의미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나병과 정신적인 나병을 앓고 있다는 뜻으로. 그렇다면 나아만이 앓고 있는 정신적인 나병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나아만은 지금 전쟁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 혼자만 나병을 치유 받을 사람임으로 자신과 수행원 한 사람 정도만 데리고 와도 되는데 그는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이 모습은 자신을 드러내는 과시욕이 대단함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요.

또한 그는 엘리사가 당연히 자기에게 나와 서서 어떤 행위를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온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왕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런지요. 생각해 보십시오.치유를 청하러 온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그럼 여기에서 엘리사를 통해서는 무엇을 알아 들어야 하는지를 묵상해 봅니다.

엘리사는 직접 나와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심부름꾼을 통해서 치유를 선포합니다. 이 모습이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아만은 자신의 생각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자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습니다. 이 모습 또한 교회 공동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한 장면이기도 하지요. 그때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 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사실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라고 한 어려운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내 몸으로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을 봉헌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형태의 봉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어쩌면 말씀을 실천해서 구원 받는 것보다 하기 쉬운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엘리사가 심부름꾼을 통해서 지시한 대로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듣는 경우든 강론을 통하여 듣는 경우든지 심부름꾼을 통하여 지시하는 그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시고 계신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나아만의 나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묵상해 봅니다.

자기 과시욕과 대접 받으려는 욕망이 강했던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고 합니다. 높이 있었던 그가 이제 내려갑니다. 어디로? 요르단 강으로. 요르단 강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고 광야 생활을 마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저 땅에 입성하기 위해 건너는 강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그 강을 건널 때 주님의 계약의 궤를 멘 사제들이 물가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고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넌 그 강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강이기도 하지요. 그 강으로 이제 나아만이 자신의 나병을 치유 받기 위하여 내려갑니다. 그리고 일곱 번이나 몸을 담그기 위해서 물에 내려갑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의미하지요. 그렇게 그는 완전히 내려갔음을 의미 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제야 그는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이제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온 세상의 하느님이심을 알았으며, 자신은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며 준비해간 선물을 받으시라 합니다. 그가 선물을 준비 했다는 것은 그는 일단 믿고 왔다는 것이지요. 믿기는 했으나 그는 처음에는 자기가 생각했던 치유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 방식은 엘리사가 자신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에 손을 흔들어 자신의 나병을 고쳐 주려니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아만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의 나병이, 곧 그의 육적인 욕망들(과시욕과 대접 받으려는 욕망)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례 때에 원죄와 본죄를 다 사함 받았으나 누가 값을 치루고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나아만에게 거져 은총을 베푸셨듯이 우리도 거져 용서를 받았습니다. 엘리사가 선물을 거절하자 오히려 나아만이 무엇을 청합니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나귀는 평화로운 시절에 타고 다니는 짐승이지요. 그 짐승 두 마리에 흙을 싣고 가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흙을 가지고 가겠다는 의미는 자신의 본질을 알았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인간이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알았음이고 그 뜻은 그 흙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분임을 고백함이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로 흙을 가져가려는 뜻은 이닐까요?

 이상으로 나아만의 나병은 주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자기 욕망대로 살때 생긴 병이며 그 병의 치유는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메세지는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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