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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15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5 조회수30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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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 같은 분이십니다. 누구도 그분을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믿음의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릴까요? 어쩌면 이 말씀이 교회로 나오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떤 상황을 전제로 펼쳐집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주어진 상황은 사람들 앞에서 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신 이 상황은 하느님을 모두 아는 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이유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아예 백지와 같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의 상황이라면 제자들은 모두 하느님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그저 시간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는 말로 지나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우리 역시 이 말씀을 같은 상황으로 해석해볼 필요를 느낍니다.

선교나 전교 차원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전파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신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하느님 백성인 사람들 앞에서 '왜 그렇게 사는가?'에 대한 질문 앞에 섭니다. 모두가 하느님게 제사를 드리고 믿음을 고백하며 십계명 앞에 놓인 심판 앞의 운명으로 사는 한 민족 한 공동체 한 신자인데 유독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만 다른가?에 대해 그리스도를 이야기해야 하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따르는 것임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해지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으며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기준이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신자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축복 또한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보여주고 말해주며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유독 다른 삶의 이유를 그리스도 때문이라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제자들의 상황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 풀어야 할 문제인 듯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 안에서는 똑같은 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키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모든 이가 하느님의 말씀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의 부족한 삶 때문에 생겼다는 점에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그저 시키는대로, 하라는 대로 의미도 모르는 종교적 예식에 몰두하고 신앙생활이라 여기는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더 문제는 세상살이는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 안의 삶 조차 사회의 이기적인 틀을 따라하며 믿기는 하느님의 규칙을, 살기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정화하고 구원해야 할 우리가 세상의 흐름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섞어가며 종교적인 예식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느님의 뜻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말씀은 이제 우리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상황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삶의 문제가 일부의 문제라면 그것은 그들의 회개를 이끌어내면 되겠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은 세상의 이치에 가장 가깝게 흐르는 생활로 신앙을 생활과 분리하며 거의 대부분의 삶이 세상의 이치에 익숙한 모습이기에 피해갈 수 없는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교회는 그 건물만으로도, 또한 몸에 긋는 십자성호 만으로도 다른 삶의 주인공들이어서 그것이 증거가 될지도 모르지만, 신자들 안에서 참 삶의 증인이 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숙제입니다. 그리고 무모하리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신자들 안에서 올바로 산다는 말은 그 말자체로 교만함으로 내몰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올바로 사는 삶이란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처럼 사는 것이어서 늘 빼앗기고, 늘 손해보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시니 기쁜마음으로 따르고 그 안에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리 살고 있는가? 하고 신자들 앞에서 말해야 할 때 오직 그리스도를 보고 살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증언의 시작이 되는 일이기에 이 또한 자격없는 사람에겐 무모한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상황과 우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너무나 닮아있는 2천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과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는 한결같은 자녀들이지만 사실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 사람과 별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이라는 것을 자랑하며 마치 하늘나라의 윗자리를 이미 차지한 듯 살고 있는 모습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 해야만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몰라야만 그 삶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혹여 당신은 몰라도 성령은 모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주신 하느님의 말씀 마저 없다고, 나는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틀렸다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당신 생명까지 걸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 같은 사랑을 잘 헤아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무시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바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증언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종교가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며 그 증언은 우리의 삶이 대답에 앞선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우리의 증언으로 다가올 위험에 걱정하지 말라 위로하십니다. 바로 그 삶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이미 알고 있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왜 그렇게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바로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그 모든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람들의 분노와 공격의 이유를 알고 맞서게 되고 그리스도가 했던 방식으로 그들에게 답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회당에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 같은 신자들에게 증언해야 할 것이고,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면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웃으며 답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으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린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흔들리지 않는 가치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에 성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증언이 필요 없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모두 같은 가치로 살아가는 천국을 맛보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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