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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된 가르침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6 조회수320 추천수1 반대(0) 신고
 
 
 
 
 
 
 
참 된 가르침 - 윤경재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15-21)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처음 태어났을 때를 살펴보면 여느 동물보다 취약하고 무능력하게 보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서고 걷고 뛰는 다른 동물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미숙하게 태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활동하기까지도 가장 오랜 양육기간이 필요합니다. 신생아가 일어서서 걷기까지 적어도 1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스스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까지 2~3년이란 세월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보살핌과 보호가 반드시 필요한 의존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하등동물일수록 태어나면 곧바로 하나의 독립된 성체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 못한 인간만이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여러 가지 본능적인 행동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신생아의 행동 중에는 부모의 관심을 끌고 보호와 애정을 얻으려는 것이 많습니다. 신생아는 무력하지만 여러 가지의 선천적인 반사행동을 나타냅니다. 손에 무언가가 닿으면 강하게 잡아대는 잡기반사는 양육자를 붙잡아 매달리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적 행동입니다. 또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들이 부모를 보고 미소를 짓는 배냇웃음은 부모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선천적인 행동으로 이해됩니다. 배냇웃음은 부모를 인식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얼굴근육의 실룩거림일 뿐이랍니다. 이러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어린 시절의 경험은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의존 심리의 뿌리를 이룹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독립에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긴 사회적 독립의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사냥을 하든가 농사를 짓는 등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익혀야 하며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으려면 사회교육을 꼭 받아야 합니다. 그 기간이 또 십여 년입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자신보다 더 힘센 존재에 순응해야 안전하고 편하게 생존할 수 있다는 의식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황제에게 세금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에 위협을 받을 거라는 공포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 등 기득권 세력이 세금을 바치는 까닭은 권위자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인간 본능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안전을 움켜쥐려는 ‘잡기반사’적 행동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황제 얼굴이 그려진 데나리온을 자신들 호주머니 속에 움켜쥐듯 긁어모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탓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지닌 본능적 행동이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랑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계획적으로 골탕 먹이려고 낸 질문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단순히 위기 속에서 벗어나는 초절의 지혜를 자랑하는 장면쯤으로 해석한다면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안전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본성을 그르치지 말고 그 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깨달음으로써 삶의 완성을 이룩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럴 때라야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감싸 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또 내어주는 감정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근원적인 ‘관계욕구’인 동시에 기본적인 ‘관계감정’입니다. 사랑은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이자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기둥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야 하겠고 또 이웃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행동하여야 합니다. 공연히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졌다고 들끓는 화를 분출하여 일을 망쳐버리는 ‘관계감정’의 손상을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관계감정은 기분에 휩쓸려 가는 게 아니라 자기자신의 감정에서 초연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감정과 나의 감정이 불꽃을 튀며 만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애착과 욕망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에는 진실한 앎과 열정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른 길을 가르치셨고 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자신에 대한 사랑도 물론 포함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사랑에 대해 제대로 된 앎이며 열정이며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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