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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자랑 - 10.1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6 조회수40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1.10.16 연중 제29주일

이사45,1.4-6 1테살1,1-5ㄱ 마태22,15-21

 

 

하느님 자랑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하느님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말없이 일하신 하느님 은총에 충실히 응답한

우리 노력의 결과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입니다.

둥글둥글 탐스러운 황금빛 배 열매들을,

또 초록빛 충만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배추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하느님 솜씨에 감탄하게 됩니다

 

하여 요즘 저는 수도원을 찾는 분들에게 자주 하느님 자랑을 합니다.

“이 배들 보셔요. 하느님 솜씨가 놀랍고 대단하지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배를, 배 맛을 만들 수 있겠어요.

이 초록빛 충만한 배추들을 보십시오.

가뭄의 시련 중에도 이렇게 잘 자랐습니다.

하느님의 솜씨가, 사랑이 대단합니다. 바로 이게 기적입니다.”

술술 나오는 하느님 자랑이 분위기를 유쾌하게, 서로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수도승들 역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자랑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자랑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어제 인용했던 아빌라의 데레사 축일에 읽은 성녀의 고백이

저에겐 새삼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성녀의 사후 발견된,성녀의 성무일도서 책갈피에 적혀있던 성녀의 글입니다.

 

-어느 것도 너를 걱정케 하지 마라.

어느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하느님만이 변함이 없으시다.

네가 인내하면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아무것도 부족치 않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말이 우리를 홀가분하게, 편안하게 합니다.

세상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세월도 젊음도 계절도 사람도 다 지나갑니다.

다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은 변함없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느님이 계시기에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허무와 우울의 어둠에 빠지지 않고 빛나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에게 삶은 허무가 아니라 충만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강론 제목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홀로 참되시고 좋으시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요 행복입니다.

 

하느님 안에 모든 답이,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행복도, 생명도, 사랑도 없습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이렇게 생명을 지닌 존재로 살아있다는 자체가,

또 서로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느님 체험이자 기적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 숨 쉬며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만물위에 만물을 꿰뚫어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 안에 살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하느님 빠진 공부 다 헛공부요, 하느님 빠진 똑똑함, 다 헛똑똑일 뿐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페르시아의 치루스 임금을 불러 당신 도구로 쓰십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에게 칭호를 내린다.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를 무장시키니,해뜨는 곳에서도 해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요 생명이요 부요함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치유요 변화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으로 가득한 세상을 봅니다.

해 뜨는 곳이나 해지는 곳 어디가나 하느님이요하느님을 피해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바로 이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모시는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이전에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이십니다.

저 밖에 멀리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지내시고자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사도 바오로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사랑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사랑하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 생명과 사랑의 말씀과 성체를 먹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하느님 사랑의 빚쟁이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페르시아 이방의 키루스 임금을 통해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셨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데살로니카 신자들을 찾아오시어

은총과 평화를 선사하셨습니다.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바오로사도의 말씀 역시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 자존감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요 자존감의 약화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았고 선택 받았다는 이 확신이우리의 자존감을 드높이고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선택되었음을

절절히 체험케 합니다.

 

말로만의 복음 선포뿐 아니라 주님은 친히 힘과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며

큰 확신을 지니고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래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며하느님을 드러내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하느님의 지혜가 환히 드러납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의 올가미가 참 간교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예스(yes)냐 노(no)냐 양자택일의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질문입니다.

어느 쪽을 대답해도 올가미에 걸려듭니다.

예스라 대답하면 민족배신자로노라 대답하면 로마 제국의 반역자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기상천외한 답변이 이들의 안목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데나리온 한 잎을 가져오게 한 후이들에게 묻습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대답이 나오자마자 전광석화, 즉각적인 주님의 답변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상 황제의 차원에서 하느님 차원으로 대화를 반전시키니

저절로 문제는 해결되고 주님은 올가미에서 벗어납니다.

 

사람마다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니 황제 역시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세상 모두가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의 것은 모두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믿음의 자세만 되어있다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찾는 것은 완전 오해입니다.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환히 드러내십니다.

2독서의 데살로니카 신자들처럼

우리의 주님께 대한 항구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희망의 인내 중에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현실과 유리된 신학은 언어유희’

강우일 주교님의 강론 중 한마디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현실과 유리된 신학은, 강론은 말장난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체험하지 못할 때

빠지기 쉬운 언어유희의 신학이자 강론입니다.

 

말과 글은 넘치는 데 사랑의 실천은 빈약한 현실입니다.

어제 읽은 한국인들은 3체의 사람들이라는 글도 재미있었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을 관찰한 조선족 안내인들의 의견인 즉

한국인들은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 하는 세 공통적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난 겸손한 이들은

알아도 모르는 듯이, 있어도 없는 듯이, 잘나도 못난 듯이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유일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어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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