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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17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7 조회수32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21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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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주변의 일을 하느님의 이끄심과 배려, 은총과 처벌 등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삶이 그분의 뜻대로 흘러갈 수도 있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꼼짝 없이 그대로 따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니 우리가 그런 기대나 판단을 하는 것은 어쩌면 절대자에게 거는 우리의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확신으로 하느님의 이끄심이라고 누군가 말을 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어떤 뜻이 있어서 이처럼 고단하고 힘든것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참지 못하면 기도나 정성으로 하느님께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이상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의 흐름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흘러가지 않는데 왜 우리를 그냥 두시는지 이해가 안될 때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고 이기적인 연결 고리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분명 잘못한 사람들이 있고 옳지 못한 사람들이 힘으로 해결하고 서로 싸워 이긴 사람이 승리한다는 공식 또한 사람들 사이에는 질서로 존재하는데 이걸 하느님의 이끄심이라 말하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런 우리의 잘못들을 하느님께 해결해달라고 그것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행운을 바라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을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이 우리에게 아주 흔하게 발생하고 또한 이런 하느님을 전하고 강조하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하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물론 그 영향력은 생각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세상의 가치가 필요해서 하느님께 매달리면 하느님이 개인적으로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며 승리하게 하신다고 가르치니 절실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가르침은 대책없이 착하게 살아 기다리는 구원보다 훨씬 가깝고 즐거운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 들어온 한 사람의 청입니다. 우리에겐 절실한 기도가 되겠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당황스런 예수님의 거절을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로 설명해야 할까요? 그러면 이 재판과 중재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몫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의 삶의 굴레에서 잘못된 질서를 하느님께 풀어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우리 삶의 단적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복음에 등장하는 이 부자는 평생 자신을 위해 대비하고 모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잘못이라고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겐 일반적이고 모범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가 가지려 하던 것과 그를 안심시켰던 것은 그의 몫이겠지만 정작 그 근본인 생명은 그 재산에 좌우되지 않는다 말씀하십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가 모은 재산을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등으로 해석하곤 하지만 그의 노력과 삶의 결과로 얻어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삶에 연결된 사회의 질서와 약속,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판단과 싸움이 그 재산을 이뤄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얻은 것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근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움켜 쥐려고 하는 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시도에서부터 우리를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의 것을 훔치고,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것마저 자신의 것으로 가지려는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사랑이 소유가 되면서 죄는 나타났고, 그것이 우리 나름의 선과 악, 정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부자의 재산을 하느님의 은총이라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 은총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것을 향해 하느님이 도와주시길 기도하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중 누가 더 잘살고,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삶에 잘못된 질서 속에 생겨난 일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신다면 그 보다 더 쉬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스스로의 잘못을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사람 앞에 고백하며 삶을 교정해가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치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개인의 욕심을 위해 달려가며 하느님을 이용까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가지고 싶어 하는 그 모든 간절한 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흐트러뜨린 이기적인 질서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석하고 하느님을 우리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시도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기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듯 우리는 죄인들도 용서하시고, 당신의 생명까지 나누시는 하느님을 항상 목격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장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힘빠지고 분노마저 일어나게 만드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삶의 이기적인 이 고리를 이해한다면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고 이해하며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힘겨운 삶을 딛고 서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만든 이기적인 삶의 고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라면 자신들이 싸우고 잘못해놓고 와서는 당신 힘으로 해결해달라는 같은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하느님이 내 편이라서 말하는 힘센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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