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난 사랑밖에 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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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10-18 | 조회수45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샬롬 (그리스도의 평화) 마르코복음에서는 마태오나 루카복음처럼 예수의 전생(前生)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요르단강가에 서 있기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밥을 벌었는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며 그가 겪었을 아픔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식민지의 백성으로, 무력한 평민(유다교의 평신도)으로, 시대의 슬픔을 안고 사는 젊은이로 살아 온 지난날을 캐묻지 않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생(前生)을 모조리 씻겨내고 새로운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례를 받기로 작정한 것은 먼저 요한의 편에 서기 위해서지요. 요한이 그랬듯이, 백성을 억압하며 부를 누리던 사제계급과 단절을 선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지요. 그가 세례로부터 복음서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예수가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 전통을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새롭게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물로 정결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후에 몸을 깨끗하게 씻었는데, 자크 뒤켄의 [예수]에서는 이때 빗물이나 길어놀은 물이 아니라 맑게 흐르는 물에 씻어야 부정을 없애준다고 여겼답니다. 흐르는 물만이 살아 있는 물이라 여겼던 탓이지요. 회당의 라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모든 신자한테도 정결례를 지키라고 요구했지요. 그래서 요한도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쿰란수도원으로 유명한 에세네파도 목욕 예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절차를 거쳐 새 입회자를 받아들였는데, 그들은 적어도 2년의 수련기를 마치면 흐르는 물에 푹 담가서 침례를 받은 뒤에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수도원에 들어갔지요. 그들이 어찌나 엄격하게 광야에서 살았는지, 로마인 플리니우스는 이 경건한 사람들을 '고독한 종족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요한도 이들처럼 세례를 행했지만 방식은 달랐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삶의 방식을 이미 바꾸었다고 증명된 사람한테만 세례를 베풀었지만, 요한은 생활방식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결과에 매달리기보다 동기에 주목했던 것이지요. 에세네파가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던 엘리트를 대상으로 했다면, 세례자 요한은 평범한 대중을 상대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지요. 엄격한 정결례는 자신의 노동으로 하루 하루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대다수 농민한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에세네파 쪽에서 보면, 세상에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딱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볼 때,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이 모두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열린 사랑, 만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을 먼저 헤아린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심판하고 가르치고 중재하는 역활을 자임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3,7ㄴ-8)라고 엄포를 놓았으며, 세리들에게 "여러분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 라고 했으며, 군인들에게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 먹지 말고 여러분의 봉급으로 만족하시오." 하고 가르쳤습니다.(루카3,13-14 참조)
그러나 예수가 다른 누구의 권위에 기대어 일할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며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29ㄴ)라고 했다지만,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사제나 예언자 등의 승인이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그에게 말을 건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성령이 그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세례자 요한이 보았다고 (1,32-34), 마태오나 마르코, 루카복음에서는 오로지 예수만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예수만이 하느님한테서 '사랑 고백'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헨리 나웬은 <그리스도인의 길> ('참사람되어'의 역)에서 예수는 살아가는 내내 "너는 사랑받는 아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에게 나의 사랑이 머물고 있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합니다. 세례사건 때 예수가 체험한 것은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먼저 주시는 첫 번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계속 기억함으로써 예수는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찬사와 배신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진리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헨리 나웬은 우리도 예수처럼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해 왔다. 나는 너의 이름을 영원으로부터 내 손바닥에 새겨놓았다. 나는 지구의 심연 속에서 너를 빚었고 너의 어머니의 움 속에 짜넣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포옹한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에게 속한다."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래야 부침(浮沈) 많은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예수를 따라 살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지요. 첫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그 사랑밖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첫사랑에 힘입어 하느님 자비를 세상에 나누는 두 번째 사랑에 몰두했습니다. 직접 빵을 나누고, 병자를 고쳐주고, 귀신 들린 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의식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게 예수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가 단순히 백성을 돕기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투신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안병무 교수의 [갈랄래아의 예수] 에서 밝히 말하듯. 예수 자신이 '고통받는 민중'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나자렛 촌구석에서 자라나 목수로 살아온 예수는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성전 세력의 비열한 착취 때문에 신음하던 백성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름 '예수' 역시 흔하디흔한 이름 중 하나였지요. 그는 지식인도 바리사이도 사두가이도 아니었고, 그럴듯한 수행자인 에세네파에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루한 생애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예수는 자신의 고통(my pain)에 머물지 않고 만인의 고통(the pain)을 함께 짊어지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하늘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이제 고통 받는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 운동(當事者運動)'을 시작한 것입니다.
*인용된 성경구절은 200주년기념 신약성서입니다. 한상봉 / 가톨릭인터넷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www.nahnews.net 2010년 04월호 야곱의 우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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