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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18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8 조회수34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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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시려는 곳에 미리 당신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고장과 고을 사람들 앞에 서야할 제자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양들처럼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어서 누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것 같지만 그들이 사는 모습은 마치 이리 떼들처럼 위험하기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미리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 제자들을 어떤 곤경에 빠지게 할지 예수님은 보고 계시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준비시키심에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파견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들보다 단 하나도 뛰어난 조건을 갖추지 못합니다. 돈도 없고, 변변한 옷가지도, 신발도 지니질 못하는 처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관계를 이용하지도 못합니다.


달리 말하면 제자들이 만날 사람들은 제자들 보다 돈도 많고, 괜찮은 살림살이에 사회적 지위 또한 갖춘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보다 더 낳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제자들의 입장은 언제든 힘이나 권력이나 재물 앞에 눌리거나 공격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에 가서 나누게 될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이 지닌 고귀한 품위에서 나오는 베풀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제자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집 주인의 마음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또한 제자들을 받아들여줄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주는 음식이 높은 사람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 일꾼에게 주는 품삯으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설명하고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모든 조건들을 내려 놓고 오직 예수님의 방식으로 자신보다 더 낳은 처지의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전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생각해보면 안쓰럽기까지 한 모습입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지금 우리는 시대가 변했다는 말로 하느님을 전하는데도 사회, 경제, 문화 어느 분야에서도 더 우월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도적적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그래서 상대적인 부유함이 그 종교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설명도 합니다.

하지만 파견된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설명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들이 앞서 간 길에 예수님이 가셔서 그 가치를 완성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져 있지만 사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움직이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당에서 십자가에 빈 몸으로 달려 계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만들고 쳐다보는 구경꾼들 마냥 아래에서 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을 따르며 숨죽이는 제자들이 아니라면 혹시 우리의 욕심 하나 하나 때문에 죄없는 한 사람을 희생시킨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리 떼 속에 한 마리 어린양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일테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실 때부터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전혀 높지 않은 배경과 삶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느님을 전하셨고, 가르치셨으며,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본보기로 죽게 될 처지에 계시면서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말하는 조건 위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조건이나 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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