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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1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8 조회수28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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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준비라는 것이 기다림으로 말하기에 너무도 막막한 것이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도 생각한다는 자체가 어려운 지경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때라고 하시니 더욱 답답한 마음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날을 아예 모르는 것으로 하고 대비나 준비가 아닌 한결같은 생활로 주님의 뜻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지혜롭다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이 오실 날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이요, 기다림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준비라고 하는 것이 하느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나, 혹은 하느님의 벌을 무서워하는 이에게는 대비나 방비의 시간이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님의 날은 어떤 느낌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오실 날을 세상의 멸망으로 설명하고 그 날에 대해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그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믿는 이들조차 그날을 두려움으로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 상황이 무슨 이유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떠난 집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 집사는 주인이 맡긴 일을 압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정해진 양식을 제때에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주인을 하느님으로 보고 집사를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들로 보았을 때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은 다름아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이라고 예수님은 정의하십니다.


이 집사에겐 주인이 떠나면서 자신에게 명령할 주인의 공백과 함께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는 당연히 주인의 뜻을 알기에 그 주인이 정해놓은 때와 정해놓은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기에 감시나 판단 받을 일이 없습니다. 주인이 없는 딱 그만큼의 시간이 자신이 이 재산을 나름대로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지금 이 재산을 해석하고 나누는 유일한 권력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없기에 지금은 자신이 하는 말이 주인의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닙니다. 물론 그 때문에 주인이 자신에게 그 몫을 맡긴 것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주인의 공백과 갑자기 생겨난 침해받지 않는 권력 위에서 집사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종들에게는 집사 자신이 법이고 자신이 주인이므로 자신의 판단이 곧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주인이 올 때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제자들은 이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주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니 복음 속에 이 집사의 자리는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하느님을 아는 이들이 펼친 복음 속에서의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아는 이들 모두를 집사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압니다. 헤아림이 부족하거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말을 꺼내기 이전의 나를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헤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 날이 온다하더라도 주님이 왜 그랬느냐 하더라도 복음을 기억하며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할 방법도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 중 누군가는 교리를 가르치고 수호해야 할 역할을 맡고 있고, 누군가는 배우고 따라사는 것이 전부인 삶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사랑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기에 배움으로 알게 되었거나 가르침으로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었다 해도 아는 것에 있어서는 사랑으로 동일합니다.


복음 속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주인의 도착 시간과 상관 없이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는 책임감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일은 주인의 일이기도 하기에 그는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주인의 마음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말 없이 와서 그의 행동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충한 집사는 자신에게 생겨난 그 의무를 권력으로 삼고 자신을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그 힘을 사용합니다. 주인이 시킨 일은 주인이나 해야 할 일이고, 나는 종이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동안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때리는 것은 다른 종들을 일방적으로 복종시키는 폭력이며 먹고 마시며 술취한 것은 아무런 재재도 받지 않을 조건 속에 주인의 힘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수단들입니다. 주인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와서 이 집사의 모습을 봅니다.


불충한 집사가 주인의 사랑을 몰랐을까요? 불충한 집사도 주인의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의 사랑보다 집사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세워놓은 법, 곧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나누어주라는 절대 규칙을 어기고 그 사랑에 크기를 저울질하고 차별을 두며 마치 주인을 사람을 차별로 대하고 다스리는 분처럼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이 잘못을 지적해주고 바꾸어줄 주인이 없다고 그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지속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에게 맡겨진 이 시간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보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세상에 나누는 사랑이 주님의 한결같은 제때에 정해진 양식과 같은 사랑이 아니라 차별되고 권력으로 나뉘어진 은총은 아닌가? 모두가 꿈꾸는 구원은 하느님만이 주실 텐데도 이미 우리 안에서 서로의 구원에 대해 미심쩍어하고 말하기를 주저하며 자신의 구원은 한 발짝 먼저 이루어지리라 이야기하는 우리의 모습은 분명 불안한 모습의 집사입니다.

이 집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언제 주인이 오는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실한 집사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것 또한 주인이 언제 오는가였을 겁니다.


하느님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구원의 우선 순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주인이 오면 집사는 어느새 같은 종의 위치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베푸는 양식을 그도 역시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주인의 사랑을 스스로 체험한 이 종이 얼마나 기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듯 합니다.

불안 불안한 하루를 보내며 아무리 먹고 마시고 취하고 사람을 굴복시키고 때려도 주인이 될 수 없다는 한계와 자신의 잘못이 늘어남에 주인에 대한 두려움도 쌓여가는 집사처럼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입으로는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모습에서는 늘 단죄와 편애와 승리만 가득한 이는 그가 하느님을 입에 담은 만큼의 잘못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만 남는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의 잘못은 그에게서 맞고 그에게 자신의 양식을 빼앗긴 사람들의 상처 속에 더 깊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어느 때보다 깊이 가슴에 얹혀 있는 하루일 듯 합니다. 발은 빼지 맙시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고도 말하지 맙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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