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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2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0 조회수29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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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싸움을 붙이시는 일을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예수님도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을 지르시고 분열을 일으키신다면 이는 해볼만한 싸움, 아니 승부가 뻔한 싸움이라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하는 싸움이니 말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세상에 와서 벌이는 싸움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싸움이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시비를 당하셨고, 위험과 죽음에 내몰리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신데 늘 그 모습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일이 벌어질 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그러나 그 불은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불이었음에도 아직도 타오르지 않았음을 안타까와하십니다. 그리곤 예수님이 만나실 장면이 예수님을 짓누르게 되리라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당신의 세례로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이 우리 마음에 놓여야 할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이라 아름답게 표현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의 이 불은 예수님이 놓으시고 지켜보시는 완성된 형태의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이 불을 놓으시려고 짓눌리심을 당하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타올랐어야 할 불을 놓으시려 예수님은 짓눌리심의 세례를 예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불이 놓이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 단어가 "분열"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의 불은 하느님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을 마음에 담은 것이 불이 타오르는 사람의 모습일테지요. 그렇다면 이 불타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 분열의 이유가 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오신 이스라엘의 모습은 역사적 배경에서 침략당하고 지배당하는 구조 속에 있지만,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결국 구원하시리라는 철저한 믿음은 단단하게 민족을 버텨주는 힘이 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이지만 실제 신앙에 있어서는 호된 박해를 받거나 간섭을 받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은 더 굳건하기만 했고, 더없이 경건하고 율법을 강조하고 민족성을 강화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견고한 성처럼 지니고 있는 흔들림 없는 이스라엘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분명 위험 속에서도 고요함을 지닌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으로 하느님의 백성임을 지켜내기 위해 율법과 예언서를 이용해 철저하게 백성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짓고 살아가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이용해 선인과 의인이 가려지고 선천적이나 후천적인 이유로 장애를 지니거나 부족한 삶의 질곡을 짊어진 이들을 죄인의 범주에 머물도록 하여 위대한 민족의 특성을 지켜가려는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하느님이 오셨을 때, 그분 곁에 유독 죄인이 가득했던 이유는 죄인들만이 주님을 찾아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리 살면서 삶의 질곡을 그들의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가시는 어느 곳에서나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죄인들 사이를 걸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질서를 따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고 그 모든 질서를 이끌 존재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눈 앞에 서 있는 같은 사람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불에 담긴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 중에서 죄인으로 분류되기 쉬웠던 평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실제 닿았을 때, 그리고 그들이 입을 열어 하느님을 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서슴없이 느끼고 이야기할 때 그동안 같은 백성들 조차 율법을 통해 죄인으로 내 몬 의인들의 경계가 갈라져버립니다. 잘 살기 위해,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준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를 수록 어찌 이 일을 수습해야 할지 앞이 보이질 않아 자신의 것을 움켜쥐려 자신 속에 존재하던 숨겨진 생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게 누구라도 말입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삶이었으면 그 사랑을 키워줄 축복이었을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낯선 이, 그리고 기대하지 않던, 무시하던 이에게서 솟아오른 불길에 당황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 불길을 꺼뜨리려 서로를 모함하고 내리 누르는 이들이 드러나는 것이 곧 분열입니다.

하느님을 증거하려는 시도가 사람들을 갈라놓게 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불과 분열은 하느님 백성에게서 일어날 일들이었습니다. 사랑을 말하고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최선의 위선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거짓 평화의 세상에 하느님 진실의 불이 가장 보잘 것 없고 세상에서 버려졌으나 천국에 들어설 이들에게 당겨짐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참 하느님을 알고 사람이 쌓은 이 모든 이기적인 기준들이 무너진다는 것이 분열의 과정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을 두고 맞다 틀리다를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이 불을 놓으시기 위해 가장 선명한 색의 불로 타오르셨음을 기억하며 분열의 모습을 찾는 것이 순서인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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