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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육적(肉的)인 삶’에서 ‘영적(靈的)인 삶’으로 - 10.2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2 조회수42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10.22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로마8,1-11 루카13,1-9

 

 

‘육적(肉的)인 삶’에서 ‘영적(靈的)인 삶’으로

 

오늘은 ‘육과 영(The Fresh and The Spirit)’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육적인 삶입니까? 영적인 삶입니까?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평생 이렇게 회개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적인 사람입니다.

 

얼마 전 써놓고 즐겨 애송하는 저의 자작시 후반부입니다.

 

-둥글둥글 탐스럽게 익어가는 황금빛 배 열매 형제들

무럭무럭 자라나는 초록빛 생명 가득한 배추 자매들

바로 이게 기적이다.

늘 봐도 좋고 새롭고 보고 싶다.

하느님의 솜씨, 하느님의 사랑-

 

늘 봐도 좋고 새롭고 보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읽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인품도 매혹적이었습니다.

무위자연, 무위진인, 영적인 사람의 전형을 보는 듯 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리영희 선생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암울한 시대, 마음이 외롭거나 영혼이 적막할 때면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찾은 이영희 선생입니다.

 

-자주 내려갔어요.

우선 순전히 물질주의적인 사회, 큰크리트 속을 떠나서 선생님 댁에 가면

마당과 주변에 살고 있는 게 그대로 자연이니까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속에서

아주 차원이 다른 인간적 생존양식 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거든요.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생활에서 정신적인 생활로,

현대 자본주의적인 생활에서 인간본연의 생활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육적인 삶에서 부단히 영적인 삶을 추구했던 장일순 선생님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무위당 처럼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어울려서 사는 분의

사상이나 자세에는 어림도 없죠.

나는 너무 서양적인 요소가 참 많아요.

사회를 직선적으로,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보려고 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분석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무위당은 종합적이라할까, 총괄적이라할까,

잡다하게 많은 것을 이렇게 하나의 보자기로 싸서 덮고

거기에 융화해 버린단 말이에요.-

 

큰 보자기 같이 깊고 넓은 품으로

모두를 안았던 영적인 사람, 무위당이었습니다.

 

-또 하나 감히 따르지 못할 삶의 자세인데,

철저하면서도 하나도 철저한 거 같지 않으신,

이게 말이 좀 모순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한 예로 그 집의 변소를 보면,

남들은 전부 개조해서 세상을 편리하게만 살아가려고 고치는데,

그냥 막 풍덩풍덩 소리가 나고 튀어 오르고 야단이 났어요.

지금도 부엌이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사모님 사시는 부엌도 그렇지,

마당 그렇지, 우물 그렇지.-

 

자연과 하나 되어 살면서

환경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웠던 영적인 사람, 대자유인 무위당이었습니다.

 

-그런 크기를 지니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언제나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이 이제 없겠죠.-

 

표현이 참 영적이고 깊어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 제자, 아름다운 매력적인 영혼, 영적인 사람

장일순 선생님입니다.

 

가을 수확을 끝낸 배 밭의 배나무들이 참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텅 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만약 흉작으로 잎들 무성했어도

풍성한 열매의 수확이 없었던 배 밭이었더라면

텅 빈 충만이 아니라 텅 빈 허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성령의 열매 가득한 텅 빈 충만의 평화로운 삶입니다.

탐욕이 탈색된 듯한 가을 단풍의 초연한 아름다움 역시

영적인 사람(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봄꽃들보다 아름답고 편안한 가을 단풍들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과연 여러분 인생 나무에는 육의 열매들이 달려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들이 달려 있습니까?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예외 없이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잘 살아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로 구원이요,

죄 없어서 구원이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다면 구원 받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에 의해 촉발되는 회개요,

회개하는 영혼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입니다.

한 없이 인내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를 위해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회개가 없는 육적 삶의 반복이라면

참 무의미하고 허무하고 결실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놔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이시고

무화과나무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육적인 사람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회개의 삶으로 영적 삶을 살라고

날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인내의 사랑이 놀랍고 감사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회개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이 미사에서 주님의 자비로 힘을 얻어 치유를 받고,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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