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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2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2 조회수31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23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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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 모든 본당에서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전교주일이라 부르는 오늘은 일년 중 어느날보다 전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우리의 사명이라 목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천주교, 가톨릭이라고 하는 우리의 종교 테두리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을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기도하고 권면하고자 애를 쓰자 말합니다.

그러나 민족들의 복음화라는 의미는 종교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습니다. 민족이라는 말이 온 세상 사람들을 말한다면 복음화라는 말은 비신자를 신자로 만들자는 목표 이전에 이해해야 할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느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70%에 달한다고 합니다. 천주교, 개신교와 같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도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랑으로 삼는 이스라엘과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 모두가 성경 안에서 갈라선 형제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이름으로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가 말하는 복음화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 속에 복음화는 하느님을 알고 있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전한다는 말장난처럼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이미 하느님을 아는 이들 가운데 우리는 커다란 호수 속에 구별되지 않는 생명수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전교, 곧 같은 하느님의 사람들을 종교를 기준으로 개종을 시도하는 것으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복음화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안으로 오셨고, 하느님의 백성에게 참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사람들 사이에 계심을 뜻하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크고 기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복음화란 우리가 말로 고백하고,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말하는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또 알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하느님과 살고 있음이 복음적 삶이며, 이를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이 복음선포이고, 그렇게 하느님을 모르던 사람이건 하느님을 이름으로만 멀리서 신앙적 대상으로만 여기던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변화하는 것이 복음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변화됨을 말합니다.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고백하고, 같은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가진 특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변하지 않는 하느님과의 삶을 우리 인생에 남겨주신 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복음의 주인공이되었고, 증거가 된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삶이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체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느님의 계명으로 하느님을 닮아가며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이 복음의 모습이며,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이기에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삶의 이유가 하느님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이 복음이 현실화 되는 순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짐작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는 준비가 아닌 이미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조건이자, 자격이고,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숨으려하고 주저합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화를 고민하는 우리 앞에 놓여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조차 의심하는 제자들, 그러나 이 순간은 예수님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시는 자리입니다. 제자들도 세상도 더 이상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제자들의 부족함은 고려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예수님의 사명은 제자들을 선별하여 골라 주어져야 할 정도로 무겁기만 합니다. 그러나 눈 앞의 스승의 부활조차 믿지 못하는 제자도 이 사명을 받습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잘못과 부족함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들의 스승이 되어 하느님을 자녀로 만들고 예수님의 삶을 가르치고 함께 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한 말씀으로 알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제자가, 아니 우리가 복음의 주인공이 아니라 손사래를 치고 부족하다해도 주님이 함께 계실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에 이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내 인생의 좌절과 결함 속에서도 지켜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복음화의 진리는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변화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내 이웃과 함께 사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흔들리고 의심하고 배반하고 주님을 죽인 이들 안에서조차 복음이 선포되고 이루어진 이유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세상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안다 말하면 그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화가 절실하고 또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기쁜 세상입니다. 바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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