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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 하느님을 사랑하면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4 조회수365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세상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휴머니스트, 다른 말로 인본주의자라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분명히 순서가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몸에 병이 들면 어떻게 해서든지 병을 낫게 하려고 애씁니다.

하다못해 손에 가시가 하나 박혔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가시를 뽑아내야만 편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웃을 여러분의 몸에 병이 든 것처럼 돌봐주며 살아가는가?

내 몸 돌보듯이 이웃을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근원은

야훼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인류에게 주었던 십계명의 정신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존경입니다.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 상호간의 존경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십계명의 정신대로 살아가야한다는 얘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십계명의 정신대로 사는 신자가 신앙인이고 성숙된 신자입니다.

로마서3장 20절에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미사 오기 전에 누구라도 다 어디 앞에 서 있었지요?

거울~

그렇죠. 거울 한 번씩은 보고 나오셨죠?

거울을 왜 보는 겁니까?

거울 보는 이유는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니면 옷매무새가 제대로 됐나?

단추가 풀러진 게 없는가? 하고 봅니다.

만일 얼굴에 뭐가 묻었을 때, 거울이 나한테 다가와 얼굴 더러워진 것 닦아 준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율법’이라고 하는 거울 앞에 서 있을 때는 내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이지

그 율법이 다가와서 내 죄를 사해주지는 않습니다.


‘법’ 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가 나타내는 법이 있고 그 글자 밑에 숨어있는 정신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우리들이 글자 그대로 알아들어야 되고 동시에 또 그 글자 밑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십계명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숙한 신자’ 라고 합니다.


성서에서 성숙한 신자들은 어떤 모습인가?

지금 내 신앙의 성숙도가 어느 정도인지...내가 얼마나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러분들 스스로가 잘 파악하고 계십니까?


우리 신앙인의 성숙도에 대한 첫 번째 기준은

성서에서 고통에 대한 태도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절에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다시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시련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종류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것인지.... 알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기복신앙을 합니다.

저 세상보다는 이 세상에서 편해야 되고, 이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아야 되고, 자식이 잘 되어야 되고.....

이 세상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백년을 못 넘는 것인데

그 백년에 비할 수 없는 저 세상은 영원한 것인데 그 영원한 것에 정신을 쓰고 정성을 들이기보다는

우리들은 이 세상 무조건 잘살게 해달라고 하는 이런 기복신앙에 많이 빠져있습니다.


순탄할 때는 누구나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 중에 그 사람의 신앙이 참 잘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순탄할 때는 다 열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형제를 제가 알고 있는데 그는 참 유식하여 아는 것도 많고 본당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저 사람은 참 신자이며 정말 뼈대가 있는 신자다!’

라고 믿었는데 어느 날 같은 레지오 단원과 언쟁을 벌이고 사소한 시비가 있었는데

그토록 열심했던 그 양반이 죽었다 깨도 언쟁을 한 사람과 화해를 못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불러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정도가 이거밖에 안되냐? 당신은 교우들로부터

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고 있는데 용서하고 그 사람 끌어안아라.”

“정말 싫습니다.”

그 분의 이중성을 보면서 참다운 신앙,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지켜보았습니다.


순탄할 때는 누구나가 다 그럴듯하게 살아가지만 나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 나에게 상처 주는

인간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 신앙의 꼬라지가 아주 여실히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서는 시련 중에 기뻐해야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거름으로 쓰실 때가 참 많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자녀들이 성숙되기 바라시며 인생이라는 실험실을 통해서 그 성숙함이 이루어집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후에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 위대한 성왕이 되었고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 철저하게 배반한 후에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으뜸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 신자들을 잡아 죽이다가

다마스커스에서 주님을 만나 말에서 떨어지는 그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이 하느님 사랑하고 인간 사랑하는 내 신앙의 성숙도의 그 첫 번째 그 기준은

내 앞에 다가오는 고통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인생에 고통이 다가와도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불치병환자였습니다. 의학자들이 얘기하기를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간질병 환자였을 것이다.’

설교를 하다가 거품을 물고 뒹굴다가 깨어났을 때 바오로 사도는 그 자존심 때문에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간절히 ‘주님 나 써먹으려면 이 병 좀 고쳐주십시오.’

했건만 예수님은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고린토후서 12장 9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내 권능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가진 자가 아니라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고통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께 뭐라고 응답합니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제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십니다.’


현대 가톨릭 신학은 바오로의 신학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바오로 신학은 우뚝 솟은 큰 산맥이요, 봉우리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위대했던 것은 맞아 죽을 뻔도 했고, 감옥에도 수없이 갇히고 모진 형벌도 당하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간질병과의 싸움, 약도 없던 그 시절에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바오로사도의 삶속에 다가왔던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위대한 점은 바오로 사도의 언변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가시, 시련과 그 고통이었습니다.


성서에서는 성숙한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의 그 첫 번째 기준을 고통이 올 때 우리들이 그것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잘 소화시키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성숙도를 재는 두 번째 기준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무조건 순종해야 됩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오기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생명처럼 여겼기 때문에

아들 이삭까지 재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자기신뢰가 자기 계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순종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느님과 나 사이의 손익계산이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는 하느님 앞에 절대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도 두 번째가 순종이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 신앙의 성숙도는  혓바닥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집회서 28잘 17절에

‘사람이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남지만 사람의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

부부 싸움하다가 남편이 쥐어박아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도

사우나 몇 번가고 계란 굴리면 언젠가는 밤탱이 얼굴이 다시 눈탱이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편이 아내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남편의 그 혓바닥으로 웃으면서 아내를 죽입니다.

그만큼 매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인간의 혓바닥입니다.

오죽하면 ‘사람의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우리는 늘 남의 혓바닥에 맞은 것만 기억하며 살지, 지 혓바닥을 가지고 얼마나 못되게 굴고, 함부로

판단하며 그 혓바닥을 사탄의 도구로 썼는지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얼마나 정화되어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압니다.

아무리 지가 구교고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도 혀를 제대로 못 다스리고 분란을 일으키며

좋은 쪽을 보기보다는 늘 나쁜 쪽으로 혀를 놀리고 산다면 그 사람은 어둠 쪽에 속한 사람이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혀를 어떻게 다스리는가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 하느님과 이웃사랑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만 놀라운 언어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언어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무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들은 말을 다듬어 가야합니다.

혀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온몸을 다스리고

나아가서는 영혼까지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큰 배가 작은 키 하나로 움직일 수 있듯이 혀도 그러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척도

첫 번째가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살아가는가?

세 번째는 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 세 가지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늘 묵상해야할 세 가지 테마입니다.


시련과 순종과 자기의 혀를 다스리는 것.

구체적으로 고통을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이는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자기 혀를 잘 다스리는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음을 알고 성숙한 신자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배티 성지 - photo by Y. bende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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