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초에 아버지께서 급작스럽게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께서, 바로 연이어 여동생과 매제도 함께 병이 났습니다. 더욱이 둘째 이모님도 암이 재발되어 같은 병원에 계신 터라 친척들이 다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거의 두 달을 화성시에 있는 수도회 분원, 서울에 있는 아버지 병원, 다른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동생네를 돌봐야 했습니다.
3주 정도가 지나자 하느님이 무척 원망스러웠습니다. ‘제가 뭐 그렇게 당신께 잘못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죽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정말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분은 아무 대답도 없으셨습니다.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의 몇몇 분이 조심스럽게 수도자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말씀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밤, 수도회에 들어가기 위해 차를 교량 밑에 세워두고 눈길을 걸어가는데 저에게 건네진 그 말들이 점점 깊게 다가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한참 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걸어온 발자국은 어느새 사라지고 걸어갈 길만 눈앞에 펼쳐 있었습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생활을 했다고 자부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금세 무너지고 마니… 이제 다시 걸어가야겠다.’
저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양한 죽음에 직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그러셨죠. 하지만 그분은 꿋꿋하게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으십니다. 좋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행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길은 오직 앞으로 걸어가야 할 한 길 뿐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아 모시고 예루살렘에 모여 지내면서도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 세상 모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서 그리고 아직도 그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분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걸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한기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