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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고 싶은 사람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7 조회수1,213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30주간 목요일 - 죽고 싶은 사람들

 


 

한 비행기에 조종사와 우주 과학자와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신부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고 하자 조종사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넷인데, 낙하산은 셋뿐입니다. 저는 아내와 첫 돌 맞은 아들이 있으니 살아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이어 우주 과학자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나의 죽음은 세계 전체의 큰 손해입니다. 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남은 것은 신부님과 보이스카웃 소년이었는데 신부님은 “얘야, 남은 낙하산은 네가 써라. 나야 살 만큼 살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고 부활에 대한 믿음도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자, 보이스카웃 소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괜찮아요, 과학자가 제 가방을 지고 뛰어내렸어요...”

 

예수님은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주는 것인데, 생명이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바치는 것만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성인들은 서로 내기라도 하듯 기회만 생기면 죽으려 하였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님은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했고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란 잡지를 창간하시고, 기도, 고행, 노동의 삶 등에서 좋은 표양을 보이셨던 분이십니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습니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10명이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수용소장은 죄수들을 불러 세워 놓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라냈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울며, 동료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10명에 속하게 된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그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Maximilian Kolbe)였습니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서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콜베 신부를 포함한 나머지 생존자 4명에게 독약을 주사했습니다. 1941년 8월 14일, 콜베 신부 나이 47세였습니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깊은 성모 신심 안에서 머물렀던 콜베 신부의 몸은 그렇게 성모승천대축일에 한줌의 재가 됐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자신이 죽어야 할 장소와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분도 죽을 기회만 노리던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제일 부러운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신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이 분도 의사셨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다가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챙길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으니 하느님이 당신나라에서 그를 얼마나 사랑해 주실까요?

바오로 사도도 항소하지 않았으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을 굳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여 죽음을 자초하였고,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도 붙잡혀 가며 로마 신도들에게 제발 자신이 순교하는데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겁을 주기 위해 헤로데가 죽이려 하니 빨리 피하라고 합니다.

저는 살기 싫다던 사람이 차타고 가다가 사고날까봐 매우 겁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결국 자살한 유다가 죽음을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바리사이들도 그런 사람이었고 예수님도 그런 겁쟁이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겁쟁이가 되면 삶을 회피하는 삶밖에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시 왕을 ‘여우’라고 조롱하시며 당신은 당신의 길을 거침없이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언제 죽어야 하는지 어디서 죽어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잘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두려운 것이지 알고 또 그 운명을 받아들이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하나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죽고 싶은 사람을 누가 죽음으로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두려워하면 빗나간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은 사람들만큼 살아있다고 느끼며, 또 자신의 삶을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할 때야만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또렷이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절벽을 위험하게 오르는 이유는 죽음 바로 곁에서만 살아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려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하면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죽을 기회만 찾으며 사는 사람들만이 두려움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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