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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위령의 날2011년 11월 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8 조회수417 추천수3 반대(0) 신고
위령의 날2011년 11월 2일.
 
마태 11, 25-30.
 
오늘은 위령의 날, 이 세상에서 살다 떠나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실은 어제와 오늘 이틀이 그리스도 신앙의 초기부터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12세기에 연옥에 대한 사상이 보편화되면서 천당에 간 영혼들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함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이 되고, 2일 오늘은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우리는 죽음 후 영광스럽게 된 모든 이들을 기억하였고, 오늘은 죽음 후에 하느님의 품으로 아직 들아 가지 못한 모든 분들을 위로한다는 뜻으로 위령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개의 날이 분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유럽 중세 문화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지 않고, 거룩하신 하느님에게로 갈 수 없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연옥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언어 안에 남은 유럽 중세적 유산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다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어제와 오늘 이틀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초기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존중하며 삽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죄인은 이 세상에서 혹은 죽어서라도,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원칙과 우리의 통념에 준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가치 기준에 준해서 행동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가치 기준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고 가르친, 그 하느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를 배워 우리가 자비롭게 행동한 모든 선한 순간들을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믿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사랑하기 위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인 우리의 시간들을 하느님은 당신 안에 소중히 간직하신다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기쁨과 흐뭇함으로 남는 것은 자비롭고, 관대하였던 그 사람의 모습들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달리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의 이해관계가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굴절시켰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리 앞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해관계가 굴절시켰던 우리의 시선도 여과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뇌리에 남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의 자비롭고, 관대하였던 모습들입니다. 그 모습들은 우리에게 흐뭇한 감동을 줍니다. 그것이 하느님 안에 거두어들여진 그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친척 친지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잠시 혹은 길게 인연을 맺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신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한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이 세상을 떠난 분들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하였고, 우리에게 관대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서도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초기부터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임종을 맞이하여 아들에게 '주님의 제대에서' 자기를 항상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위한 성무일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옛날 성당들 안에는 군주(君主)들과 주교들, 소위 그 시대 실세들의 유해(遺骸)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음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그들의 유지를 표현하고 있는 그들의 석관(石棺), 곧 무덤들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그들과의 유대를 사는 길입니다. 동시에 신앙인의 희망을 표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 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슬퍼할 수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기억하지 못할 분들도 우리에게는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성인의 날인 어제와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희망을 엄숙하게 표현합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 또 죽음의 경계를 이미 건너가신 그분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간절하게 고백하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 없습니다. 그 기도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며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두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 그분들과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여, 나만을 생각하였던 순간들은 허무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우리가 자비와 관대함을 실천한 그 순간들은 하느님 안에 거두어져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 이미 살아 계시는 분들이고, 장차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만나고 함께 기뻐할 분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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