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매님이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중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 자매님은 며칠 전 내가 올린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한 글을 읽고 그 ‘우리들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지금 겪는 고통을 잘 참아 견디겠다는 글을 남기셨다.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만이라도 아이들의 엄마로써 곁에 있을 수 있는 ‘기적’만이 최고의 소원인 그 자매님이 남긴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자리하고 있다. “사무엘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
난 그 자매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난 홀로 남은 집에서 사무엘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그 어린 것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를 차마 짐작조차 할 수도 없다. 그저 한 없이 측은하고 또 측은한 마음에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이런 우리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항상 침묵하신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게 항상 우리의 가엾은 처지를 외면하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과연 계시는가? 만약 계신다한들 그렇게 무능한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은 모른다. 하느님은 침묵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 영원의 침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은 거부한다. 침묵 속의 하느님을 뜻을 깨닫기보다는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기만을 기도한다. 사람들은 하느님마저 자기들이 원하는 데로 말하고 움직이기를 기도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볼 때 나 역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측은한 마음으로 혼자서 몰래 눈물을 훔쳐내며,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방법을 기도하면서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나를 이끄시는 분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자기로부터 하느님의 개입을 확인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더 이상 없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통하여 스스로를 들어내 보이신다. 하느님은 침묵하시지만 언제나 역사하고 계신다. 침묵 중의 소리, 비존재의 존재를 듣고 체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사무엘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사무엘의 엄마가 혼자서 울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선인장은 하느님이 너무나 그립다.
“주님의 하신 일은 좋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업적 하나하나는 때가 오면 제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것만 못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때가 오면 그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온 마음을 모아 소리 높여 노래하여라.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집회39,33-35)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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