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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30일 야곱의 우물- 마태23,1-1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30 조회수348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본문 첫 단락 (마태 23,1­7)에서 예수님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3절) 때문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의 특징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단락 (8­12)에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2절)라고 말씀하시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한 자신감을 단죄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죄는 대부분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교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지성을 더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단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도와주기보다는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위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눈길에 대한 자기 체험과 성찰이 없는 지성은 너무나 쉽게, 불행히도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위선’으로 연결됩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위선’은 사소한 윤리적 잘못이 아니라 커다란 ‘죄’입니다. ‘죄’는 과녁을 잘못 맞춘 삶,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향해 화살을 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루카 1,32)인 하느님은 자신을 높여 하느님이 되려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어둠에 빠지게 한 이 ‘자신을 높이는 이’들을 당신의 강한 팔로 물리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 ‘비천한 이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낮추다’에 사용된 그리스어 (타페이노오, )는 ‘낮게 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시키다.’라는 뜻인데, 은유적인 의미로는 ‘나를 다른 사람들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낮은 지위나 사회적인 위치를 갖는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어의 풍요로운 의미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노래 ‘마니피캇’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1,46­48)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길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눈은 항상 낮은 곳을 바라보고 계십니다.(다니 3; 시편 113,5; 138,6 참조) 그러나 인간의 눈은 항상 위에 있는 것과 높은 곳을 향합니다. 가련하고 곤궁한 사람을 눈여겨 바라보고 도와주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따라서 이렇게 낮은 곳에 시선을 향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이시고, 높이는 사람은 낮추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을 낮추는 것은 ‘어린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8,4) 성경에서 ‘어린이’는 육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어린이를 말합니다. 순수하거나 죄가 없다는 의미에서 ‘어린이’가 아니라 자부심이나 자만이 없는 존재,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분쟁의 뿌리가 서로 높아지려는 자만, 다른 사람 없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욕심에서 온다는 것을 잘 알고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라고 권고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훈련입니다.(필리 4,12)

묵상(Meditatio)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많은 영성가들, 하느님의 종들도 낮은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을 굽어보시는 하느님 눈길에 대한 체험에서 영감을 받고 회심하여 자신의 길을 가고,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를 창설하여 교회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성경의 체험, 교회의 체험을 바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하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목적에 가련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가난한 종인 우리가 필요했고, 하느님 외에는 아무 도구가 없는 우리를 선함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마리아가 들었던 ‘하느님의 비천한 여종인 당신은 복된 여인입니다.’라는 찬사도, ‘불행하여라, 이 위선자들’이라는 불행선언도, 모두 우리 자신에게 해당됩니다.

기도(Oratio)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시편 131,1­2)
임숙희(가톨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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