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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3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30 조회수29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30일 연중 제 31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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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 들으려 노력해도 전혀 목소리를 들을 길이 없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가 알아듣는 방식으로 다가오실 때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으로 하느님을 알게 하셨고, 우리의 근본과 참 진리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사람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뽑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느님을 모르는 거대한 존재로만 느낄 때 구체적인 하느님을 알게 해 준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세상이 하느님을 알게 해 주었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가 직접 연결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준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처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고, 삶의 올바른 질서가게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 이후로 모세의 역할은 수많은 예언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어져 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하느님을 배웠고 하느님께 기도로, 삶으로 다가가며 하느님의 구원해주셨음에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미래도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 때에도 모세의 자리를 잇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이야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전하는 이들임을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전하고 있고 사람들은 온전히 그들의 역할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가치는 인정하시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엄청난 독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외형적인 모습까지도 일시에 의미없는 것으로 무너뜨려버리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구절하나를 우리의 교훈으로 새기고 있지만 실제 이 말이 나오게 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잘못의 이유를 알아들어야 이 의미를 더욱 잘 생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모세는 그 고단한 인생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정복국의 왕자가 되어 자랐고, 자신의 동족을 살려준 이유로 도망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길러준 나라에 대항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을 만나 완전한 변화를 만났으나 외형적인 모습은 가진 것 모두를 잃고서야 자신의 직책을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모세는 왕자의 자리를 벗어나 도망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그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결국 자신들의 민족과 같은 방랑하는 처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민족들에게 전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민족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았고, 같은 처지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이끌었으며 하느님께 백성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예수님의 시대에 모세의 자리는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대로 있으나 살아가는 모세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함께 살며 함께 고민하던 모세는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한 역사 속의 사람으로 남았고, 그의 사명을 이어받은 이들은 모세도 살면서 누리지 않았던 높은 자리에 앉아 모세의 후광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삼고 모세의 얼굴을 빛나게 하신 하느님을 배경으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한 위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모세의 율법,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곧 하느님이 받으셔야 할 거룩함과 영광의 단어를 대신 받는 이들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가르치는 이가 그 가르침을 똑같이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권위의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권위에 어울리는 치장과 행동, 품위를 지니는 것이 골몰합니다. 그래야 보통 사람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대단함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세가 실종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어떤 느낌이셨을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살지를 않고, 배우는 사람은 시종일관 죄인이 되어 버린 삶을 사는 세상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수만명이 있어도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가르침과 전혀 다른 화려함으로 가르침의 권위만 강조되는 세상. 그래서 하느님의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의인이 되고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죄인이 되어 버리는 이상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가르치는 사람도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먼저 알고 믿었다는 사실이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사랑에 차별로 작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이유로 서로 나누고 차별을 두어 대한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 우리는 그런 실수를 아주 오래전부터 해 온 모양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을 전해야 하고, 누군가는 배워야 할 테지만 정작 그 내용은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야 할 것임을 망각하고, 그 역할의 구분이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순서매기는 것처럼 여기는 일은 아직도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면서 하느님의 일은 삶에서 하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공식적인 "의인"으로 모든 것을 누린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마치 특별한 은총처럼 나누어주는 듯 섬김을 받고 대신 신자들을 비굴하게 만들어 버리는 지도자들이 "공인된 하느님의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는 모습은 너무나 비슷해 보입니다.


문제는 어떤 이들도 이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모습의 결론은 구원자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도 늘 죄인처럼 살아야했던 예수님 곁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들어 내었고, 사랑의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사랑에 늘 구걸하듯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누구를 말하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러울 수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는 통쾌할지도 모르겠고, 누구는 불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누구는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고, 또 누구는 좌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핵심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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