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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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10-31 | 조회수32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의 흐름이 주고 받은 것이 기본이 된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한 쪽이 끊기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흐름은 사랑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사랑이란 것이 주는 것과 그것에 대해 되돌려 받는 것으로 표현이 바뀌면서 때로는 주는 것과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준 사람의 입장에서 그만큼을 받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마치 받으려고 준 것처럼 되기도 하고, 아니면 주었으니 그만큼을 받는 것이 당연한 듯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거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베푼 사랑을 되돌려 받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부분을 넘어서도 보편적으로 드러납니다. 종교에서도 모든 신앙행동이 신의 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약속하고 기원합니다. "청하면 들어주신다", "빌어라. 될 때까지 빌어라", "주신다고, 된다고 믿고 빌어야 주신다" 이런 이야기들은 신자들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열쇠가 됩니다. 물론 그 채무 관계에 선 신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그저 주실 분으로만 정해지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니 하느님도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시긴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먼저 빌고, 청하고, 예물을 드린것 처럼 손을 내미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일까지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치자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우리가 삶으로 그분의 선물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 이치일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되갚아라 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만 매달리고 하느님께만 달려가서 먹여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삶이니 우리가 인생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고리를 오히려 끊고 그 삶의 근본이 사랑이라는 것을 살고 가르쳐 모든 세상이 하느님이 만드신 근본을 찾으며 행복하게 살아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삶의 방식이고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 안에는 채무관계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아버지의 사랑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받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받은 것도 갚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 문제가 되겠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깊이 박혀있는 이런 거래의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를 고쳐보라고 권하십니다. 보답이 예상되는 사랑의 행동을 끊어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보상의 관계를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이 이루어집니다. 보상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이들, 아니 함께 자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을 식탁에 초대하라는 권고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권고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잘 해주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에게 그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먹을 것을 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의미가 예수님이 불쌍해서였겠습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보상은 단순한 식사 대접이상의 보답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자신과 격이 맞거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 하다못해 말이라도 통할 수준이 되어야 자신과 같은 밥상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은 삶의 어떤 이유로든 하느님의 축복에서 소외된 이들입니다. 격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함께 하는 것으로 불경스러울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초대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자신의 소중한 자리로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사람들 사이에 직접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가르치고 계시는 순간입니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그들 사이에서 따로 모셔서 대접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신심이나 의로움을 확인받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도록 가르치고 계신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에게 벗어날 수 없는 고리를 채우십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에게 보답받을 기준이 의인들의 부활이라면 그가 의인이 되려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접하며 의인임을 확인받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은 참 의인이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어떤 형태로든 보답을 예상하고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거래가 불가능한 감정이요, 노력입니다. 사랑은 그저 함으로써 그 이유를 확인하고 계속 진행되는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으며 이를 놓고 고민하는 것 또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사회가 말하는 거래하는 사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가능하지도 않는 거래 또한 벗어나야 합니다. 격에 맞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모습의 거래도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함께 살라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의인이 되고 싶다면 지금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들과 기쁘게 얼굴을 맞대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면 그 이유를 알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건 우리가 모시려 애를 쓰는 하느님은 지금 그 자리에, 그런 인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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