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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히말라야 등반대원들의 명복을 빌며.../ 민훈기 (펌)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1 조회수328 추천수2 반대(0) 신고
 
 
마흔 여덟 살, 시월에 하늘나라로 간 또 한 사람 / 민훈기


시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해마다 시월이 되면 생각나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지요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해마다 시월이 되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들이 생각납니다.사실 가톨릭에서는 매년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고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결산 회계연도가 10월말까지 인가 보네요.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결산해서 11월에 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이들을 일괄적으로 기억하고 기도하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시월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32년 전인 1979년 10월 22일 51세에 돌아가신 저의 부친 민바오로 아버님이 생각나고 2004년 10월 11일 48세에 북한산을 등반하다 선종한 아우 민성기 요셉 신부, 아우보다 몇 년 빠른 1996년 10월 15일에 선종하신 저희 부모님처럼 고향이 이북이신 아버지 같았던 노경삼 다니엘 신부님, 1999년 10월 2일 선종한 아우를 동생같이 아껴주셨던 유해남 요한 수사님, 물론 10월 4일이 되면 위의 분들이 사부로 삼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도 있어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억하지요.

  최근에 저의 동생 민요셉 신부와 같은 48살 나이인 10월 18일 히말리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세계적인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박영석 대장이 시월에 생각나는 형제들의 반열에 입회하였습니다. 지난 10월 23일엔 예수고난회 광주 명상의 집을 들렀다가 광주 망월동 5․18묘지를 들러 민주 영령들을 위해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우 민요셉 신부가 선종하기 며칠 전 보낸 글, 인천교구 차동엽 신부님이 발간하는 ‘참 소중한 당신’ 2004년 11월호에 실린 대림 1주일 강론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 날입니다” 서두에 “시월입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참 소중한 당신 가족들을 북한산에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참 좋은 계절, 오색단풍이 울긋불긋 반기는 이 좋은 계절에 북한산에서 선종한 아우와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雪山에서 고이 잠든 박영석 대장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시월의 마지막 날에 박영석 대장과 절친한 사이였던 소설가 박범신님이 쓰신 글을 소개합니다.

  <그는 그렇게 山이 되었다
  박영석 대장과 2인(신동민․강기석 대원), 나는 '죽음'이라 말하지 않겠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박영석 대장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작년 이맘때던가, 남극탐험을 얼마 앞두고 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성공했으니 안락한 생활을 할 때도 되지 않느냐고, 왜 또 그 험한 길을 굳이 가려 하느냐고 범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는 거두절미 자신의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탁 두들겼다. 나는 찔끔해서 섬광 같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뻔한 일상에 습관적으로 기대 살고 있는 내 유약한 삶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신동민, 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는 뉴스가 들리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지금 나는 조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산악소설 '촐라체'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죽고자 가는 게 아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고 모든 대륙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북극과 남극점을 발로 찍었다. 일찍이 어느 산악인이나 탐험가도 도달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기록과 함께 그도 나이가 들었고, 올해로 꽉 찬 마흔여덟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새로운, 더 위험한 길을 향해 담대하게 떠났다.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 문명이 주는 달콤한 일상은 가짜이고 허울에 불과했다. 이미 그의 발밑에 깔린 히말라야 14좌에 새로운 '코리안루트'를 내겠다는 꿈은 그의 꿈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가지 않겠나?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계속 갈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누군가의 등대,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지도가 되기 위해 이미 위대한 정상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길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그들이 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는 빙벽에 둘러싸인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고산 등반가들에겐 한 발 한 발이 모두 ‘무덤과 정상 사이’에 걸쳐져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들은 ‘지각이 더 맑아지고’마침내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대인에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존적 모럴이며 비전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야성을 거세당한 우리 대신 그곳에 갔으며, 걸었다. 놀라운 생의 비전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려고.

  차세대 산악인이라 손꼽혔던 신동민 대원은 고된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동료들을 위해 묵묵히 ‘청국장이나 홍어찜’까지 맡아서 조리했던 덕인이었으며, 서른세 살의 강기석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아카데믹한 산악인’이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는다. 박영석 대장은 물론, 그들에게도 ‘코리안루트’는 개인의 꿈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이상향의 뜻으로 쓰이는 샹그릴라는 본래 ‘언덕 저쪽’이라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언덕 저쪽’에서 신들메를 고쳐 신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오며 손을 흔들어줄 것 같다. “산에 가야 산악인이지!”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렁우렁 귓속을 울린다. 그와 그들은 단지 산악인이 아니었다. 우리의 꿈을 대신 짊어지고 간 극상의 모럴, 참된 비전이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출처: 민요셉신부님 추모홈피 : http://min0319.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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