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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0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2 조회수30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첫째미사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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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구원을 꿈꾸는 우리가 보기에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들을 위한 날, 혹은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축하하고 축원하는 날이 오늘 위령의 날입니다. 위령성월을 시작하며 모든 성인의 날로 이 달을 시작하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떠난 후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하심 아래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함께 살기를 바라기 때문일겁니다.

그래서 위령의 날 첫째 미사의 복음은 모든 성인의 날의 복음과 일치합니다. 같은 복음으로 이틀을 지내는 것은 강론을 해야 하는 사람에겐 어려운 숙제일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주인공들을 참 성인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의미 깊은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복선언에는 하늘나라에 들어서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입게 될 이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행복하다"라고 선언된 이들은 그 하늘나라에 들게 됨으로써 참 "성인"이 됩니다. 교회가 인정하고 모두의 가르침으로 삼는 성인들도 많지만 실제 성인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늘나라에 들어선 이들, 그래서 삶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있는 이들입니다. 행복선언의 내용은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하기 위해 살거나, 하느님을 닮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순간 하나 하나가 하느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모범은 그들을 행복하다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온전한 해석일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복음을 이기적으로 해석할 때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조건으로 이 행복선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당연히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의 평가가 내려졌으니 이를 공식처럼 만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그렇게 복음을 볼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를 어떤 기준으로 대하시는지 모두는 아니라도 복음에서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가 최종 가야 하는 곳은 하늘나라고, 얻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위로와 땅과 기쁨과 자비와 하느님의 얼굴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온갖 상입니다. 이 모든 목표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위에 열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 하나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모습으로 실천되어야 할까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물적이든, 영적이든 욕심이 없는 상태로 마음이 가난한 것을 해석하곤 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마음의 욕심을 없애야 한다거나 현실적인 물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결국 더 큰 것을 차지하기 위해 참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상태 그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 나라에 대한 꿈 조차 그냥 두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하느님이 하실 일이시니 내가 꿈꾸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은 자유이지만 그 조차 욕심일 수 있다면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챙기지 않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도무지 욕심이 없는 사람, 자신을 챙길 여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 자신 생각 이전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더 소중해 보이는 사람, 자신의 것을 가지기 보다 다른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를 위해 세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을 위해서 언제나 존재하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듯 합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눈물의 이유가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슬픔이란 울기 위해 가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든 감정이 자제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설 때 슬픔은 자신 밖으로 드러납니다. 위로받아야 할 슬픔의 주인공들은 억지스런 감동이나 통곡이 아닌 삶의 순간에 짓눌려 아픔을 겪는 이들이거나 누군가의 아픔 때문에 눈물짓는 위로하는 이의 모습일 겁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삶의 자리를 빼앗길만큼의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동요를 쉽게 일으키지 않는 이, 결과적으로 그가 당할 일은 땅에서 내어 쫓기고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것이 대부분일 겁니다. 같은 이유는 더욱 커지고 당해야 할 손해도, 억울함도 늘어나지만 그는 결코 마음의 온유함을 잃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늘나라의 땅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비단결같고 원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화가 참아지고 온유해지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지만 가장 안타까운 열쇠는 그 대상을 미워할 수 없어서 입니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 그는 당하는 수모를 받기만 합니다. 갈 곳도 없이 내어 밀리지만 자신을 그렇게 한 사람도 상황도 끝까지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 걱정이 더 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에 주린 이가 흡족해진다는 것은 큰 상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바란대로 모두가 바르게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바른 삶을 사는 세상을 하늘나라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은 의로움에 주린 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온전히 정의를 지키고 그것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삶, 그것의 목적은 상을 받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바르게 사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의 전부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자비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정도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모자람에, 또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줍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참회의 정도를 보고 베푸시는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 앞에 우리의 부족함이 햇살에 눈 녹듯 일시에 사라져 버립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용서에 댓가가 있다면, 그 사랑의 나눔에 받으려는 목적이 있다면 그 자비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얼굴 앞에서는 부끄러움에 살 수 없을 지경이어서 죽게 되리라는 공포마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처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기준에서 보면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일 텐데, 그것은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깨끗하다는 표현은 사뭇다른 느낌입니다. 의인은 죄 앞에서의 당당한 우리 나름의 평가라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런 감정 자체를 느낄 수 없는 그저 순수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익을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질서세우지 않고, 그저 선한 마음으로만 모두를 대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일 겁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를 본 것이 하느님을 본 것과 같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 동시에 그분을 하느님이라 고백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힘의 논리로 운명이라는 굴레로 자신의 신분과 질서를 지키게 하여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자신의 처지와 세상이 만든 질서 앞에 사랑의 방법으로 사랑의 내용으로 모두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게 하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며 누구도 죽음이나 단죄나 지독한 미움으로 내몰지 않는 사랑의 세상을 이루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있고, 신분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는 이 모든 상황을 넘어서는 사랑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질서는 무너집니다. 물론 여전히 세상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결코 그런 사회적 기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벽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참 평화입니다. 전혀 불안하지 않고 위협적이지 않으며 서로 숨죽이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 그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저런 사람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이 세상에 사는 모습을 우리는 그저 좋게만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영악하고 이기적이며 그래서 힘이 셉니다. 그저 말로는 좋은 이런 사람의 처지는 예상되는 불행의 길, 위협의 길, 고난의 길로 이어질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미 행복선언을 받은 이들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의 삶이란 박해의 연속일 겁니다. 모함이 일어나고, 상대적으로 흠이 되지 않을 일들까지 순수함에 지워지지 않을 때가 탄 것처럼 모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늘에서 받을 상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박해와 모욕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리 화가 나거나 억울하거나 할 일은 아닙니다.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고, 눈물 짓는 것이 당연하며, 모함 당하고 손해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오히려 그들을 위해 겪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그런 이들과의 싸움이 아닌 그들을 위한 일이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도 버릴 수 없고, 미워할 수도 없을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선언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이 하늘나라라면 누가 그것을 틀렸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원한 것은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늘나라와 같은 곳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하신 아버지의 뜻 자체입니다.


위령의 날,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다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맡겨드리며 그들이 산 삶에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면 그 부족함을 하느님이 채워주시고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곳,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곳은 이 행복함의 이유 모든 것으로 우리를 살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 판단하시고 선택하시는 곳이니 그 사랑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위령의 날,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영혼들이 성인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좋은 곳에 가셔서 잘 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여전히 사랑하며 불완전하고 힘겨웠던 그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 채워진 행복함으로 사셨으면, 그리고 다시 우리와 만났으면 하는 기도로 하루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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