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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0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3 조회수27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10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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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다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와 모든 것이 다르십니다. 구별되는 차이가 아니라 모든 것의 수준과 내용 모두가 너무 격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느님께는 아무런 보탬도 도움도 되질 않는데, 그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의 생명마저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처음부터 당신에게는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너무 쉽지 않습니까? 실상 모든 성경의 내용을 아무리 파악하고 정수를 안다해도 이 쉬운 결론 하나 보다 값진 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상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질서를 하느님 앞에 세우고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나쁜 습관 같은 것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안된다 어렵다고 말하며 더 나쁜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의 뜻인 즉, 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데, 분명히 자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는지에 대한 불만입니다.

"감히"라는 말을 쓰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라는 말들을 많이 하곤 합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이야기라면 성당의 자리에 얼마든지 말을 바꿔가며 쓸 수도 있겠습니다.

성당과 죄인 역시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이 계신 곳과 죄인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렇게 부조화스러운가 봅니다. 물론 공적으로 이런 부조화가 늘 일어나는 성당이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고해소에 늘어선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사람으로 고해소의 중심에 놓인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말입니다.


성경에서 드러난 이야기를 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이를 깨닫지 못한 듯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아직도 세상은 구원을 이야기하며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애초부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구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조하신 하느님과 애초에 함께 살던 그 세상인 하늘나라에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바로 "죄"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올려주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부족한 덕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일텐데 그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 할 도리를 다하고 신자로서 성사를 모두 받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으로 천국의 자격증을 따서 확인받는 것 마냥 서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한 사람만 골라내신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맞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실제는 그 사람들 조차도 하느님 앞에서 부족함의 죄인으로 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우리를 끌어올려주시는 것이 구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직천당'이라고 부르는 분들의 성덕을 폄훼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 조차 하느님이 판단하실 일이니 우리가 말할 바는 못되겠지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인은 같이 놓고 생각할바는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을 꿈꾼다면 이는 분명히 이 둘 관계가 영향을 나눠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이 죄인과 함께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늘나라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분명 하느님 앞에 죄인처럼 서야 할 텐데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에겐 처음부터 구원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죽고 나서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듯 합니다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상한 습관들을 고쳐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에 공식적인 죄인이 되어버린 세리들과 죄인들이 천지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었고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의당 그래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성전에 들면 고개부터 땅에 박고 하느님께 그야말로 비굴한 모습으로 숨어 기도해야 하는 세리와 같은 죄인들은 하느님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공동체에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골라내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것이 공동체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내는 길이라 그들은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하느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그들이 버리고, 소외시킨 이들을 하나라도 더 회복시키려고 노력중이십니다. 이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죄인을 구하시려는 하느님과 의인 중의 의인이 되려는 하느님의 사람들의 모습. 누가 더 거룩해 보일까요?


이것이 현실이라면 우리에게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논쟁이 마치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놀라운 신심을 지니고 있는 고귀한 의인이냐? 아니면 아무와도 어울리며 별 생각 없는 듯 사람좋게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냐의 문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무리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이 품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맘 좋은 사람들 덕분에 성당에 마음대로 다니는 죄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허물을 다 아는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성당은 의인들이 다니는 곳이 되고픈 욕심을 가지기 시작한 듯 합니다. 되도록 능력있고, 도덕적인 사람들만이 차지하는 성당은 대외적으로도 종교중에 고귀하고 고결한 종교가 되었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은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뭐 불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보기에도 좋고 하느님의 거룩함에 딱 어울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 그 말을 하고 싶을 거구요.


그러나 여기에 예수님의 힘 없는 설득이 있습니다. 죄인에게나 부족함의 사람들에게는 힘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들어도 의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사랑한 것에 대한 포기를 모르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모습에 대한 완성도로 하느님의 사랑이 시시각각 변하리라 생각하고 표현하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 우리는 이미 사랑하셨기에 길을 잃어도 숨어 버려도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의인이 되고자 그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승리하며 살아온 인생이 허무해지는 순간입니다. 그 한마리를 찾아 버리면 같아지는 인생인데, 그 한닢을 찾아버리면 마저 채워지는 열 닢 자리 인생인데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상대적인 우월감 앞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에 동의하지 못하며 여전히 죄인들과 함께 하기를 꺼리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선택하지도 노력하지도 못하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느님 앞에 서서 도도한 거룩함과 의로움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소외시킨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할 겁니다. 그때의 판단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실 것이며 그 판단은 이미 우리가 비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으니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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