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32주일. 2011년 11월 6일). | |||
---|---|---|---|---|
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11-04 | 조회수535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32주일. 2011년 11월 6일
마태 25, 1-13.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색한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신랑 한 사람에게 열 처녀가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결혼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랑과 신부가 약혼하면, 일 년 정도는 각자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결혼식을 거행할 날이 오면, 신랑이 신부 집에 와서,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며칠 동안 잔치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와 함께 잔치에 갈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또 하나 어색한 것은 처녀들이 등불을 준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등불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다섯 사람은 예비 기름까지 준비하였습니다. 본시 신랑은 등불이 필요 없는 낮에 와야 합니다. 만일 등불을 필요로 하면, 그 준비는 당연히 신랑의 몫입니다. 예비 기름을 미리 준비했던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함께 초대받은 처지에 기름이 있으면, 기쁘게 나누어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신랑도 이상합니다. 기름을 사러 갔다가 다섯 처녀가 늦게 도착하니까, 신랑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잔칫날 잔칫집 문을 잠근 것도 이상하고, 그 기쁜 날, 늦게 도착한 신부 친구들을 신랑이 그렇게 거절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 시대 혼인 잔치에 비유하면서 여러 가지 무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비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을 ‘슬기로운’ 사람이라 부르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가 말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복음서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이야기를 제공한 마태오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제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7 24).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제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7, 26).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듣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의 내용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7, 21).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분입니다. 잔치는 구약성서(이사 25, 6)와 신약성서(루가 22, 30)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서 열리고, 초대받아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서가 말하는 슬기로움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혹은 마귀를 쫓았다는 말은 모두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달라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우리도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공간에는 하늘과 땅이 있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도시 빌딩의 숲 속에서, 아스팔트를 밟으며,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삽니다. 우리는 하늘도 보지 않고, 땅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웃도 함께 사는 동료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데에 장애물이거나 경쟁자로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내가 더 잘 살아야 합니다. 도로에서는 내가 떠 빨리 달려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현대 어떤 작가는 “남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웃은 욕심, 경쟁심, 미움, 다툼 등 우리를 지옥과 같이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는 자기반성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땅도 공해로 죽어가고, 사람도 땅과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오염된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은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소중하지 않으며, 이웃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우러러 땅과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슬기로운 길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가슴속에 새기고, 그 선하심을 동기로 세상과 이웃을 봅니다. 하느님이 선하시기에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에게 기쁨도 주고, 즐거움도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열 처녀에 대한 비유이야기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와 같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잔치를 비유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하느님, 당신 생각에 그저 기쁘고 즐겁습니다,’라는 시편(9, 1) 말씀을 깨닫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세상과 이웃을 보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확산시키는 데에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고,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도 하느님과 함께 있는 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