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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계단을 오르듯이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4 조회수942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 연중 31주간 가해 금요일 - 계단을 오르듯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작은 항아리에 자갈과 모래와 물을 모두 집어넣어보라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먼저 물을 넣고 그 다음엔 모래, 그 다음엔 자갈을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갈이 다 들어가지 못하고 물도 흘러넘쳤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갈을 먼저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모래를 넣으며 작은 항아리를 흔들었더니 모래가 자갈 사이로 다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더니 물도 모래 사이로 스며들어 자갈과 모레와 물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항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이루어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미운 사람도 용서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랑하기 이전에 용서하는 것부터 배워야합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려면 용서가 쉽게 됩니까? 쉽지 않기에 용서도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가며 해야 합니다.

1.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더 괴롭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미워하면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남을 눈물 흘리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는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미 지나가 바꿀 수도 없는데, 용서를 하지 않으면서 남은 인생을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용서 안 하면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2.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로부터 나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느님은 정의이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3. 상대를 이해하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은 어쩌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연민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유일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4. 이젠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그 죄를 상대의 잘못으로 돌리게 되었던 것처럼 누구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은 죄가 없기에 누구도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죄는 내 안에서 사랑을 몰아내기 때문에 미움이 저절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 판결 받았기에 그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 상대를 판단하고 심판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용서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자동차가 기름 없이 혼자 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인 좋은 열매들은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따라서 먼저 죄의 사함을 받고 기도를 통해서 내 안에 성령님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6.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또 내 영적인 성장을 위해 기도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만이 남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까지 성장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나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무작정 용서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너무 아픈 기억이 있어서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면 되지도 않는데 굳이 용서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땐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내 처지와 수준을 알고 행동하는 겸손함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성사의 보속으로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는지 모를까봐 그런 보속을 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 째는 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나 기도서를 읽는 염경기도가 그것입니다. 생각보다는 입으로 하는 기도가 가장 낮은 단계의 기도입니다. 사람이 처음 만나 말을 하기가 어색할 때 자신의 이야기만 열심히 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성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묵상기도가 그것입니다. 성령님의 비추임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단계입니다. 이는 상대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서로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며 이야기가 오고가는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의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인데, 그저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단계입니다. 이를 관상이라고 합니다. 말이 오고가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어색하지 않고, 성령님의 사랑이 둘을 감싸 하나로 만드는 단계인 것입니다. 여기가 성체조배의 정점입니다.

물론 아무리 애인 사이라도 서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묻고 대답하고 어떤 때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두고 향해야 할 단계는 항상 관상의 단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묵주기도만 하는 분들에게 바로 관상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바로 그 위의 단계를 조언해 주어야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기도회 같은 데서 방언기도라는 것을 합니다. 저는 그것도 일종의 육체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로 수천마디 기도를 하느니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기도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도입니다. 그것 자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되고, 다만 조금씩 이성으로 하는 기도로 올라오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그러한 교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잣집 집사는 약삭빠른 사람이고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지 않은 그 뒤 몇 구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사실 선행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해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에 집착하여 남을 위해 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바로 윗 단계인 돈으로라도 친구를 사귀려고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나 같지 않다고 뭐라 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완전히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내 바로 윗 단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부터 실천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도 계단을 한 걸음에 뛰어 올라가지 못합니다. 차근차근 우리 자신을 성장시킬 줄 알아야겠습니다.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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