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스 철학자 풀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영역에서 독립한
존재로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육체와
하나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의 존재 이 전에는 아무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 다음은 무(無)가 아니다.
기독교 믿음의 핵심 가운데에는 우리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우리는 죽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재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원초적 근원인
우리의 참된 고향을 발견한다.
단지 나는 성경과 종교의 전통에서 제시하는
비유로만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죽음 뒤의 삶을 혼인 잔치에 비유한다.
‘영원한 잔치’, ‘하느님을 인식함’, ‘영원한 안식’ 등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결국 모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비록 보이는 그림이 서로 달라도
그 뒤 중심에는 ‘공통된 확신’이 있다.
이 공통된 확신이란,
우리는 죽어서 영원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참된 본질을 발견한다는 믿음이다.
참고한 문헌 “인생을 이야기 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이 글에 대한 묵상과 성경말씀.
이제 2011년도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가운데,
그 막바지에 와 있으며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어제는
나의 작은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산 이들은 자기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라도
알지만 죽은 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도 미움도 그들의 질투도 사라져 버린다.
태양 아래에서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그들을 위한 몫은
이제 영원히 없는 것이다."(코헬9,5-6)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돌아가기 때문입니다."(시편104,29참조)
어제의 죽음으로
오늘 우리는 작은 부활의 삶을 누리는 것이니,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고
오늘의 삶을 즐겨야 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14,7-8)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지나간 어제
그리고 지난 70년의 숫한 날들이
우리 앞에 꿈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받으시고 저희에게는 오로지 주님의 자비만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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