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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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에 사랑의 불을 밝혀주시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말씀에서 “그때에”(마태 25,1)로 시작되는 비유의 서두는 미래에 닥칠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4,44.50; 25,3145 참조)
언제였던가요? 우리나라에서도 휴거설로 민심을 흔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2독서에서와 같이 초대교회 신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는 기대 속에 있었지만 재림이 지연되자 혼란과 갈등을 겪었습니다.(1테살 4,1314; 마태 24,2328 참조) 마태오는 종말 심판설교(2425장)를 전하며 반드시 ‘종말은 오겠지만 그때는 모르니 깨어 있으라.’(24,3225,30)는 말씀으로 종말의 지연과 함께 종말 사건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열 처녀의 비유’를 시작합니다.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25,1)는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로 구분됩니다.(2절) 산상설교에서 슬기로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시편 14,1 참조) 그러면 무엇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움일까요?
신랑이 늦어지자 기다리다 ‘모두 잠이 들었던’ 열 처녀와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는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대조를 이룹니다.(마태 25,56)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 자체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실책은 아니지만 ‘한밤중’은 어둠의 절정으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인 동시에 새날이 시작되는 시간임을 드러냅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7절) 한밤중까지 밝혀두었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열 처녀의 소임이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여부가 그들의 실태를 평가하게 합니다.(24절)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비로소 준비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미리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10ㄱ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밤길을 달려온 신랑의 발걸음을 등불로 밝히며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가지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1011절) 신약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와 직결되는 구원의 사건이며(22,114)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마태 9,15; 요한 3,29; 2코린 11,2) 슬기로운 처녀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일 준비를 갖춘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닫힌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준비되지 않은 이의 처절한 모습을 대변합니다.(마태 25,11)
또한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처녀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는 신랑의 외면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23 참조)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는 처녀들의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이 지성적인 표현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과 관련됨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꺼져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달라.”(25,8)고 청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부탁을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9절) 이 기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행실 곧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기 때문에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6,1921.24.33 참조) 따라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중대한 과오는 필요한 시간, 필요한 곳에서 밝혀야 할 사랑의 불꽃 곧 사랑의 내적 힘을 기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416; 6,2223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가 되든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 해도 주님의 뜻을 따라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며 사랑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마태 25,13)
묵상(Meditatio)
‘오늘과 내일’이란 시간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분기점이 됩니다. 오늘을 펼쳐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오시는 주님을 위해 등불을 밝힐 만큼 이웃을 향한 나의 마음은 쾌청한가? 뜻밖에 오신 주님 앞에 부끄러워 감추어야 할 어둠은 없는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그 시간이 ‘한밤중’이라 해도 언제든지 불을 밝힐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의 기름은 준비되어 있는가? 기름은 준비하되 정작 불길을 당길 심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준비하지 못한 빛은 내일의 어둠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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