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32주간 월요일 - 웅덩이와 바다
어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미사 할 수 있어? 수녀님들이 고해성사 줄 수 있어?” 하며 사제들이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를 그런 것들로 근거를 대기도 합니다. 또 그런 권위를 행사라도 하듯 고해성사에서 신자들을 매우 엄하게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신부님들 한 번쯤 안 만나 본 신자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고해보는 것이 싫다고 냉담으로 들어가는 교우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언제든 죄의 용서를 빌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왜 고해소까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있는 신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엄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대해 묵상하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도 식힐 겸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해변에서 한 아이가 조개껍질에 바닷물을 담아서 자기가 판 웅덩이를 채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 하는 것이냐?”
“이 웅덩이에 바닷물을 다 담으려고요.”
“어리석구나. 어떻게 바닷물을 그 조그만 웅덩이에 다 담는다는 말이냐?”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인간의 협소한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 아닌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보다 삼위일체의 깊은 곳까지 파고든 분입니다. 아직도 그 분의 삼위일체가 널리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스스로 자신이 세워놓은 삼위일체 진리는 무한한 바닷물을 작은 웅덩이에 채운 정도의 수준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우리 은총은 그 분의 무한성에 비추어보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증가시켜 달라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믿는 대로 된다고 하십니다. 즉 나무가 옮겨 심겨질 것을 믿으면 바다에도 바로 옮겨 심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런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다 그렇지만 믿음 또한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을 통하여 초자연적 능력을 얻게 되셨고 그 성령님을 잃지 않기 위해 광야의 유혹을 이기고 나서야 첫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는 대로 될 것이다.” 하신 것처럼 당신이 믿는 대로 모든 병이 고쳐지고 죽은 이들도 살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증가시켜 달라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겸손 되게 우리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다고 고백해야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에 비추어 우리 안에 넣어진 믿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믿음의 공로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는 자신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믿음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도 고해성사 때 사제가 내 준 보속을 해야만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바다에 비해서 작은 웅덩이에 있는 물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바치는 보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이지 우리가 바치는 보속 때문이 아닙니다.
사제들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만큼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만큼 큰 기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적들을 사제들의 믿음으로 이루어내는 것일까요? 사제들 중 어떤 누구도 이런 기적을 일으킬 믿음이나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너무나도 미약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인데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을 증가시켜달라는 사도들보고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천 명을 먹일 빵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 계산만 하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는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빵을 나누어주는 제자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줄 알겠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믿음으로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들은 다만 그런 믿음을 가지신 분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자신들의 믿음으로 하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의 혼인 잔치 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누구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만약 마리아에게 그런 은총을 받을만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은총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종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은총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의 중재자라 합니다.
사람들은 종들이 포도주를 가져오는 것만 보지만 사실 그 기적을 누가 일으키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성사는 바로 마리아의 바다와 같은 믿음 덕분이지 우리의 작은 웅덩이 믿음 덕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사를 거행한다고 뽐낼 것이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믿음보다는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고 뽑아 주신 이들 중에서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이도 있었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믿음이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안다면 조금 더 겸손하고 자비롭게 성사를 집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