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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0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9 조회수356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9일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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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마흔여섯 해나 걸려 세운 예루살렘의 성전. 하느님께 봉헌한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흔여섯 해가 걸리는 정성의 극치를 이루는 성전은 아닐지라도 우리 주변에 크고 아름다운 성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들에서 매일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신 그분의 성체와 성혈이 한결 같이 우리와 일치를 이루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이 성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로 세웠고, 공동체의 새로운 가정처럼 여기고 드나들며 주님의 집에서 살아가는 우리인 듯 여깁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생활을 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이루며 삽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성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대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심에 존재했습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구원의 증거가 되어 주었고, 하느님이 주신 말씀을 모셨던 그야말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성전을 꼭 순례해야만 했고, 성전 안팎으로 하느님에 대한 예절이 끊이지 않던 신앙과 민족의 핵심이 된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축복이 샘처럼 터져나오는 곳이었고, 모두가 희망을 걸고 찾아드는 고향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세우는 데 걸렸다는 마흔여섯 해는 이 성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 주고도 남는 기나긴 정성의 시간이었고, 그만큼 이 성전은 훌륭하게 세워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작은 회당에서도 볼 수 없는 예절들과 분향과 노래들이 성전에 가득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성전의 중심에 하느님 말씀의 궤가 있었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오늘 예수님, 곧 우리가 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이 찬미하고 찾아드는 곳에 그 주인공이 당신의 자리를 찾으신 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말씀의 성전에 가셨으니 하느님이 당신 자리를 찾으신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터집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예수님의 눈 앞에 펼쳐져 있던 광경은 성전의 모습 이전에 성전으로 인해 먹고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성전이 목적이 아니라 성전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만큼 흐르는 시간 속에 성전에 바쳐지는 예절의 중요성은 율법으로 지켜지지만 그 성전을 찾아드는 사람들의 삶은 간편해졌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간편함을 돕는다는 나름의 지혜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들고 성전을 찾으면 얼마든지 제물을 사서 바칠 수 있는 문화가 생겼고 예수님 앞에 펼쳐진 것은 장사치의 혼란스러움만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대하고 찾는 모습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찾아보기 힘든 격노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쏟아집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장사하는 집'이 생각의 발목을 잡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장사'가 무슨 뜻일까요? 그 장사가 비둘기나 소와 양, 그리고 환전상들의 모습에서 비춰지는 그야말로 장사일까요?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내셨다고 해서 그들만이 이 장사의 장본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장사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장사' 말입니다.

예수님의 불같은 불호령에 그 큰 장사의 주인공들이 묻습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성전을 세우고 하느님을 모신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겠다고 한 것도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전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고, 하느님의 보호아래 선택된 민족이라는 증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전은 마땅히 세워야 하는 것이었고, 마흔여섯 해가 걸린 대를 이어가는 기나긴 시간은 그들의 정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전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그분이 성전이 필요하실리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을 바로 알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고, 이 사건을 통해 인류의 본보기가 되길 원하신 뿐입니다.

그 하느님께 백성들은 감사로 이 성전을 세웠지만 이 백성들은 하느님이 원하신 방향으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다하는 정성에는 아낌이 없었으나 그들이 세상 구원의 본보기가 아닌 세상의 우월한 민족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이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으로 남게 되셨고 시간이 흐르면 이 마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미가 변해 버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구원은 아주 먼 사건이 되었고, 지금 당장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와 참회 예물을 받는 신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전 안에 감금당했고, 하느님은 그 예물의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시고 벌 주시는 무서운 분이어서 수호신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의무만을 주고 보복을 일삼는 두려움과 질투의 신이 되어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겉은 구원의 상징이지만, 실제는 자신들을 짖누르는 절대자의 상징이 되었고, 하느님께는 원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감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징벌을 피하는 방법으로 갖가지 예물을 시기와 사건에 맞춰 바쳤고, 이 마저도 진심이 아닌 두려움의 의무로 바뀌자 이 제사를 통해 하느님과 일종의 거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거래를 하느님이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성전을 이용해 먹고 사는 사람들, 그들의 손에서 거래되는 것은 놀랍게도 하느님께 누군가의 죄를 대신해서 바쳐질 제물이었고, 누군가의 감사를 대신해 피흘릴 생명의 피조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쳐진 제물은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정해진 법에 따라 그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을 찾는 백성도, 그들에게 제물을 받아든 성전에 일하는 이들도, 또한 그들에게 율법과 전통으로 그 거래를 합당하게 만드는 이들도 모두가 이 장사에 함께한 이들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이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복음은 증언합니다. 이 성전 속에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던 하느님의 말씀이 성전 밖에서 성전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 성전이 무엇인가하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그 성전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성전으로 생각한다면 그 성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전에 대한 모든 편견과 이기적인 생각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복을 얻기 위해 바치는 예물도 상관이 없고, 우리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며 올리는 뇌물과 같은 예물도 소용이 없습니다. 돈을 들고 와서 좋은 예물을 고르는 것이 수고의 전부인 정성 없는 제사도 필요없고 그 제사의 예물을 팔아서 살아가려는 이들과 그 예물의 남겨진 몫을 차지하고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안락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성전은 죄를 저지르고 누우치는 이에게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고 감사하는 이들에게 그 삶을 이웃과 나누게 하며 아픈 이를 서슴 없이 잡아 세우고 어려운 이에게 함께 해 줌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합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함께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갈 삶이라 알려주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세운 성전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는 가게일 뿐이었지만, 참 성전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참 집이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혹,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 예물의 법을 하느님이 세우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무수한 법 속에 담겨진 뜻을 새기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법들이 예물을 탐하시는 하느님의 바람 때문이 아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함을 알고, 죄책감의 시달리는 이를 사람들 앞에서 짐을 벗겨 주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 천막에 머무시던 하느님, 위기 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들의 앞과 뒤에서 그들을 지켜주던 하느님, 헛된 길을 가지 않도록 십계명으로 사람들의 삶의 흔들림을 잡아주시던 하느님, 끊임 없이 대들던 백성을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시는 하느님은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보상 받으시기에는 너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성전에 대한 말씀에 우리는 참 많은 말들을 꺼내놓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의 성전이 허물어질 그 성전과 많이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말들로 정당화 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고치기에도 발을 빼기에도 너무 깊이 잘못되어있는 모습입니다. 차라리 괜찮다고 뭐가 잘못이냐고 너는 방법이 있냐고 나무라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이 성전이 허물어지면 우리는 다시 세울 우리 스스로의 성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가 다니는 그 성전을 하느님이 원하셨을까요? 아무리 훌륭한 성전에 감격스러운 미사를 드린다해도 우리가 그 성전을 나올 때는 이천 년 전 초라한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누어졌던 예수님의 몸과 피만이 우리의 몸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나올 때, 우리가 몸 담았던 그 화려한 성전은 무너지지만 우리 안에 홀로 성전으로 계시는 주님이 계시니 우리는 여전히 성전을 안에 모신 성전이라는 것도 잊지 맙시다. 항상 하느님은 우리 보다 먼저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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