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두 분의 동양계 수녀님들이 아무래도 한국 분들 같아서 이번 주일 미사를 마치고는 인사나 드리려는 요량으로 얼른 제의를 갈아입고 성당 밖으로 나가보았다.
수녀님들은 항상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 같다. 벌써 저 만치 앞서 걸음을 재촉하는 수녀님들을 향해 ‘수녀님’하고 불러보았더니 두 분이 동시에 고개를 뒤로 하는 것이 아니나 다를까 한국 수녀님들이셨다.
그런데 한 수녀님의 반응이 재밌었다.
“어? 한국 신부님이네?”
“왜요? 하긴 사람들이 외모만 보면 이탈리아 신부라고 착각들을 많이 하지요. 하하하”
“호호호, 전혀 아닌데요. 저는 중국 신부님인줄 알았어요.”
그 수녀님이 나를 중국인 신부로 생각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좀 시골스런 분위기, 한 마디로 ‘촌티’가 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주일마다 첫째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이었다. 수녀님은 헤어지면서 한국 신부 같지 않은 세 번째 이유를 덧붙이셨다.
“한국 신부님들은 수도자나 신자들에게 절대 먼저 인사 안하는데 신부님은 좀 특별하시네요.”
그 수녀님이 ‘한국 신부들에게 가지는 선입관이 너무 부정적이다, 아니다’ 혹은 그 수녀님은 ‘자신의 선입관을 바탕으로 한 과잉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있다, 아니다’라는 차원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고 싶지 않다. 또 ‘한국 신부들’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열심한 ‘많은 한국 신부님들’께 누를 끼치는 경솔함도 피하고 싶다. 위의 내용이 자칫 내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전혀 다른 의도이다. 다음은 다름 아닌 내가 나에게 하는 부끄러운 반성이자 고백이자 충고이다.
“너는 너무 잘 먹고 잘 산다. 이제 너에게 가난하게 살아달라는 주문은 꺼내기도 어려울 만큼 너는 너무 많이 가졌다. 또 너는 부자들과 어울리기만을 좋아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질에 대한 탐욕을 제발 벗어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사제 삶의 절반은 돈으로 얼룩질 것이다.”
“네 마음은 너무 흐리고 갈라졌다. 고독이 맺어주는 열매로 진리를 향한 목마름을 달래기보다는 가벼운 세상의 쾌락과 인연들로 고독을 덮으려고만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갈라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느님을 섬기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욕망은 벗어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사제 삶의 절반은 독주에 취해 흥청거리며 지나갈 것이다.”
“너는 너무 교만하고 게으르다. 누구에게나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너는 너무 교만해져서 사람들의 충고를 듣기는커녕 하느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너무 게을러서 비대해진 몸으로 뒤뚱거리며 제단을 걸어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역겹다. 겸손하고 부지런하여라. 먼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손수 땅을 일구어 얻은 포도를 하느님께 봉헌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스스로 네 자신에게 사제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그 발상지인 인도에서 확실히 밀려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소위 ‘자질이 의심스러운 승려’들로 인하여 민중들의 마음이 점차 멀어졌기 때문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제는 결국 하느님 백성의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 인기를 얻기 위해 애쓰는 추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저항을 느끼라는 것이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20,26-2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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