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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1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2 조회수299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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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성경을 읽으며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실망하실 때입니다. 사람의 잘잘못에 대해 판단하시고 거기에 구원과 징벌이 있음은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 자체에 대해 실망을 하신다는 것은 실낱같은 구원이라도 희망하기를 꿈꾸는 사람에겐 치명적인 선언일 수 있습니다.

물론 노아나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의 완전한 멸망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안해보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를 되돌리려 하실 정도로 실망한 사람들의 모습은 더 없이 화려하고 성공한 이들이 득세하고 치열하게 다툼이 이어지는 세상이었습니다.

징벌로 이어진 결과에 우리는 모두 몸을 떨고 있지만 실제 그 이전의 세상은 가장 화려한 모습이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싸움이 크게 벌어지고 거기에서 이기고 성공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 그리고 끊임 없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살육과 모함과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거기에 합당한 보상이라는 끔찍히도 화려한 세상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까지 돌리는 세상이 멸망 직전의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악마가 보여준 세상은 가장 화려한 도시였으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이야기하는 악마의 모습은 세상이 보는 시각이 얼마나 잘못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바로 그곳이 하느님 징벌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에 막막함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적대자에 시달리는 과부는 상대적으로 힘 없는 백성입니다. 올바른 판결을 원하는 과부의 사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재판관의 이야기로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이 무심한 재판관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들,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을 맞을 때 누가봐도 준비된 이들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인생에서는 실패한 듯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 오히려 과부와 같은 어려움에 빠진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삶을 제대로 살아도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삶.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 그런데도 사람들의 눈에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모자람이 있는 듯, 그리고 그 때문에 정성 마저 보잘 것 없는 듯한 사람. 그들의 삶이, 기도가 하느님께 닿을 때 하느님이 어떻게 대할 지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삶은 고단하고 어리석은 삶으로 비춰지고 세상의 많은 가치들 보다 더 존중되지 못합니다. 삶에서는 늘 가려지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소외되기 마련이며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윗자리가 하느님이 마련하시는 자리인 듯 여기고, 구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가 하느님의 축복의 크기로 재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평범한 예수님을 끊임 없이 단죄하고 무시하려 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그들 앞에서 늘 고개숙인 삶을 살아야 했던 가난한 이들과 죄인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가슴 한가득 맺힙니다. 아프고 쓰릴 정도로 힘겹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입에서 떨어질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들이 믿는 것이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일 때, 그리고 지금의 자신도 아니고 좀 더 성공한 미래의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일 때 과연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허망한 믿음의 실체를 먼저 당신의 몸으로 체험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 사랑하는 이들, 하느님 덕분에 세상에 가장 훌륭한 민족, 사람이 된 이들이 하느님을 어찌하였습니까?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못박았고, 우리의 지금을 못박았으며, 그렇게 해서 좀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누군가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차마 지금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는지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이천 년은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시간이지만 이처럼 쉽게 겹쳐져 보이는 것이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이 더 힘겨운 건 그나마 이천 년 전의 사람들은 잘 몰랐다는 핑계라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과가 아닌 예측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끊임 없이 기도하고 사랑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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