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제 33주일 - 하느님이 공평해 보여야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참으로 그 노랫말에 공감을 하며 불러본 적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불러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하늘같이 존경스러운 스승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 저도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 주며 산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해준 게 없다는 섭섭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또 특별히 해 준 것도 없는데 미안할 정도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도 이렇게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전에 한 때 키가 작은 콤플렉스가 있어 자살하려고 했었던 어떤 청년이, 그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마침내 연매출 수십억에 달하는 인터넷 쇼핑몰로 크게 성공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의 키는 168cm 이고 예쁜 아내도 있었습니다.
기자는 나름대로 키의 콤플렉스를 딛고 이루어낸 성공실화를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 기사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이 섞인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차라리 죽지 그랬냐? 그 키가 작아서 자살해야 하면 더 작은 사람들은 다 죽어야하냐?”
저도 사실 그 사람과 같은 키로서 키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키 큰 사람들이 부러운 것을 보면 아직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드니 남자치고는 너무 작은 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세를 위해서라도 키 큰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저보다 큰 여자와 함께 길을 걷다보니 제 자신이 더 난장이처럼 느껴져서 만나는 것까지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제가 되어보니 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제가 되는데 키 작은 열등감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제로 사는 것만큼 외모가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은 드물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형에게 재산의 반을 나누어주면서 그것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에게 하얀 종이를 두 장 주면서 한 장은 대장간에 또 한 장은 미술가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대장간에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종이를 화로에 넣어 불을 땠습니다.”
아버지는 또 다시 물었습니다.
“미술가에게 갖다 주니 그것으로 뭘 하드냐?”
“미술가는 그 종이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똑같은 종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화로에 던져지기도 하고 그림을 담는 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가 재산을 가지고 참으로 귀하게 쓸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머지 재산을 네게 주겠다.”
하느님도 이렇듯 각 사람에게 정당하게 선물을 배분하십니다. 사제가 된 것이 외모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졌었더라면 사제가 되거나 사제로 살아가는데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에게 이런 키와 이런 외모를 주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도, 못된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처럼, 교만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을 드리려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결국 교만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망하게 된 이유는 주인의 뜻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더 뛰어난 사람이라 교만하고 있었기에 주님의 달란트 분배가 불공평해 보였던 것이고 그러니 주님의 재산을 불리게 되는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종은 주인이 무서운 분이라 자신이 그것을 사용하다가 잃었을 경우가 두려워 감추어 두었다고 변명을 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작은 능력만 준 것 때문에 주인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똑같은 달란트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적합하게’ 나누어주십니다. 갓난아기와 어른에게 똑같이 딱딱한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공평함이 아닙니다. 각자의 능력에 적합하게 주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공평하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을 불만족스럽게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서 쓰거나 아예 썩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엔 누가 보아도 많이 부족하게 받고 태어났으면서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누가 보아도 받은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작은 부족함도 참지 못하고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 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죽음이 선고가 있은 지 수십 년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쓴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오체불만족>이란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지만 항상 웃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살아가면서, “행복과 장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뇌성마비 환자로 살다가 지금은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송명희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쓴 시를 잠시 묵상해 봅시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런 분들 앞에서 너무나도 많이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몰랐던 우리들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사실 정말 적게 받았던 것이 아니라 교만하여 스스로 적게 받았다고 느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자신이 받은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 쓸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불충한 종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례력의 마지막을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달란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는 겸손일 것입니다. 교만이 온 인류의 죽음을 불렀다면, 인류에게 생명을 주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겸손과 순종이었습니다. 감사했기에 온 자신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모든 죄가 교만에서 시작되었다면 지금 마지막 순간으로 치닫는 이 때 우리의 겸손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시다.
<나 오직 주만 따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