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빛의 자녀들 - 11.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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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11-14 | 조회수40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11.13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잠언31,10-13.19-20.30-31 1테살5,1-6 마태25,14-30
빛의 자녀들
함께 해도 단풍잎들 다 떨어진 나무들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11월입니다. 바로 이 때 자문, 자답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믿는 이들 누구나 물어야 할 아주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인가?’매일 묻는 자가 수도자란 말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답은 단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요,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여기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방향이라는, 한 마디로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빠지면 그야말로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허무 그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빛의 자녀들입니다. 오늘은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말씀 묵상 중 지혜서의 다음 대목 중 ‘경외(敬畏)’라는 말이 참 반가웠습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더불어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났습니다. ‘부부간의 열정은 잠시고 신뢰만이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우아함도, 아름다움도 잠시지만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 신뢰는 영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지혜요 단순한 삶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좌우명도 위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이었습니다.
오늘 집회서의 주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여인은 과연 경천애인의 모범입니다.
오늘날 불행과 혼란은 하늘을, 하느님 경외를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경외와 연관되어 떠오른 다음 ‘경(敬)’자가 들어간 말들 경천, 경애, 공경, 경건, 존경입니다. 모두 하느님 경외에 원천을 두고 있는 말들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함양되는 공경(恭敬), 경애(敬愛), 경건(敬虔), 존경(尊敬)의 마음 자세입니다. 이런 ‘경(敬)’을 잃은 사회는 결코 평화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 교육 역시 하느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참 적절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너는 네 손으로 벌어먹으리니,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축복에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경외에 기초하지 않은 행복은 위태롭기가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둘째,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영성생활의 궁극목표는 깨어있는 삶에 있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영혼이 환히 깨어있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요? 제 정신을 잃고 사는 시간도 꽤 많을 것입니다. 깨어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사는 이도 있고 미래의 두려움을 앞당겨 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도 결국은 지금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깨어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있음은 찬미입니다. 깨어있음은 감사입니다. 하여 깨어있는 영혼들은 끊임없이 기쁨 중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빛나는 깨어있음에 사라지는 어둠이요 치유되는 몸과 마음입니다. 환히 빛으로 깨어있을 때 나쁜 생각의 유혹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도둑처럼 들어오는 탐진치(貪瞋痴)의 어둠의 유혹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늘 깨어 살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우리들은 그대로 빛의 자녀이자 대낮의 자녀입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우리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올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죽음 앞에서 늘 환히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깨어있는 삶이 아름답고 빛납니다. 그러니 다름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살도록 합시다. 하느님을 경외할수록 맑고 또렷한 깨어있는 영혼입니다.
셋째, 하느님께서 주신 탤런트를 잘 활용하는 삶입니다.
누구나 하느님께 받은 탤런트입니다. 깨어있을 때 발견되는 하느님께 받은 내 탤런트입니다. 우열을,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선물입니다.
서로 경쟁하라 주어진 은사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라 주어진 은사입니다. 각자가 꼭 필요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정신이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어 내 받은 은사의 선물을 몰라 억울하고 안타깝게 질투와 시기로 낭비되는 정력과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상대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평가하십니다. 각자 받은 탤런트에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100점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니라 각자 노력의 충실도를 보십니다.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의 자세를 보십니다.
다섯 탤런트를 받았다가 다섯 탤런트를 남긴 이나, 두 탤런트를 받았다가 두 탤런트를 남긴 이나 똑같이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제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했을 때 해피엔딩 인생입니다. 문제는 한 탤런트 받은 자의 반응입니다. 한 탤런트 받아서 꼭 숨겨두었다가 그대로 바친 이의 하느님관이 참 안타깝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자기가 자초한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탓 추호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탤런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완전히 하느님에 대한 오해요 착각이었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자비하심을 알았더라면 한 탤런트를 이렇게 방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활용해 한 탤런트를 남겼을 것입니다.
이런 탤런트의 방치는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무시요 모욕입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맞갖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우리 모두 내 받은 은사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사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하느님을 경외할 때 깨어 살게 되고 자신이 선사 받은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며 살 수 있습니다. .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받은 은사를 최대한 잘 활용한 우리를 향해 칭찬하시며 당신 잔치의 기쁨을 맘껏 누리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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