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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14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4 조회수29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35-43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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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세상에는 사람을 구분짓는 여러가지 기준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준이 있고, 또 때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기준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개성을 나타내는 차이의 기준들은 무난히 받아들이지만, 신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질이나 수준에 관해서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격렬한 행동들을 보입니다. 그 수준을 정복하려는 사람과 기준자체를 철폐하려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입장을 두고서 늘 부딪힙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과 달리 평생 뗄수 없는 기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장애"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장애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극복되는 상처가 아닙니다. 극복되지 않는 결함을 생긴 이후부터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는 그냥 차이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정상인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장애는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그냥 차이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시선대로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루어지고 누릴 수 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이들은 차이를 넘어서 차별을 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한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이 문제는 그리 큰 고민 거리가 아닙니다. 공유될 수 있는 불편함이 아니라 그저 안타까운 사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공감의 자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 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람들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고 살지만 멀쩡한 사람과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하느님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에게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눈먼 걸인에게 들리자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능력의 주님, 하느님을 부르는 목소리에 담을 수 있는 바람은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애타는 사연입니다. 사랑이라 부르는 단어가 이처럼 절실한 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르쳐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공통으로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학교에 들어가 사회라는 것을 배우는 어린이에게 조차 가르쳐지는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모습과 조건 이전에 사람이기에 주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정상이라는 기준 하나를 세워 놓고 그 기준에 부족함을 가진 사람을 마치 사람의 가치에서조차 밀어내고 맙니다. 그나마 채워질 수 없는 그 부족함을 포기하고 나머지의 것으로 세상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수고와 고통을 안쓰러움이 아니라 그 삶의 모습으로 가치를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에서처럼 하느님 앞에서도 저만큼 밀어내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가르쳐주었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서는 것조차 자격에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들의 부족함이 죄 때문인지 그들의 잘못으로 인지 묻기 전에 판단부터 하는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걸인을 부르시고는 그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에게 바라는 것을 묻기도 전에 우리는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그 가치를 그가 직접 말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께 그의 마음을 드러낼 기회를 우리가 빼앗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의 바람을 대신 알려줄 이가 있다고도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를 냉정하게 나무라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를 부르시어 그의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들으십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바람을 이야기하고, 바로 그 믿음으로 은총을 얻습니다. 그의 앉은 길을 비켜가던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나무랐습니다. 오직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든 보통일 수 없는 이에게서 같은 사람의 목소리와 바람을 들으시고 그 가치로 그를 일으키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보통의 가치가 없어서 힘겨운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이 누구보다 절실하지만 그 초라한 모습에 하느님의 은총을 의심하고 심지어 죄를 덮어 씌우고 고작해야 동정의 눈길이 사랑의 전부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시며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물으시고 그의 믿음으로 그를 눈 뜨게 하신 하느님을 잘 새겨 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기준 이하의 장애를 가진 이들의 평생이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해마다 같은 복음을 몇번씩 대하면서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합니다. 그들이 보통 사람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었다고 해서 특별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극복한 삶이란 그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보통의 삶이 전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치를 우리와 동등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드려지는 찬미의 소리가 귓전에 들립니다.

왠지 그 찬미의 소리에 눈을 뜬 이에게 부끄러운 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을 것 같아 우울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반성이나 질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겐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분의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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