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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연중 제33주간 - 주님, 저를 부르셨으니....[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5 조회수255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대도 주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세상 것에 매달려 사는....

세례 받고 난 후에도 점집, 철학관, 무당한테 들락거리는 신자가 30%가 넘어간대다는 통계예요.

이게 천주교신자들의 현주소예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두려움이 어디 있어요?

두 번째로 무엇이 우리 눈을 가리고 있을까요?

앞날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예수 따라 다니다 쫄딱 망했다!

예수가 왕이 되면 논공행상에 의해서 뭔가 한 자리 얻을 줄 알았는데...이게 뭐야 인생 망첬다...

앞날에 대한 불안  ‘뭘 먹고 살아갈까!’


세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게 상실감


네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것 분노예요.

분노에 가득 차 살 때에는 예수님을 못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너무 믿었어요.

그러나 그 믿음은 세속적인 믿음이었지요?

그 믿음이 깨지니까 보복으로 바뀝니다.

이게 바로 약한 인간의 모습이지요.

빨마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셨던 그 분이 비참하게 죽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바로 보복으로 이어져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요!

두려움, 분노, 앞날에 대한 상실감....

이런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예수님을 못 보게 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늘 투정을 합니다.

주님, 내가 힘들 때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나는 왜 늘 혼자 살아야 합니까?

내가 힘들 때 손 한 번 잡아주셨으면...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텐데....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셨는데도 항상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떤 이가 살아왔던 길을 뒤돌아보니까 평지에는 자기 발자욱과 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대요.

그게 누구 발자국?

예수님 발자국

가파른 산비탈 올라갈 때는 자기 발자국밖에 없었대요.

‘아, 이때는 주님이 나를 떠났구나! 나 혼자 이 높은 산을 고생을 하면서 넘어왔구나!’

불평을 했습니다.

주님. 내가 뒤돌아보니까 힘들 때 내 발자국밖에 없었어요.

그때 주님, 어디 가시고 나 혼자 높은 산을 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하시는 얘기가

“이놈아, 그 발자국은 니 발자국이 아니고 내 발자국이야...

내가 너를 업어서 날랐기 때문에 니 발자국은 없고 내 발자국만 남은 거야...

내가 너를 업어 나르느라고 등골이 다 빠진 것 너는 모르냐! "

30리 길을.... 3시간을.. 예수님과 가면서도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단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어요.

엄마가 걸음마 가르칠 때 어떻게 해요?

뒤에서 아이 옷자락 잡고 ‘아이고 내 새끼, 잡고 걸어 봐!’

엄마는 손 슬그머니 놓고 문지방 뒤에서 어떻게 하나...봅니다..

애가 걷다가 엄마가 없는 것 같으면...뒤 돌아보다가 넘어지지요?

엄마는 언제든지 슬라이딩 을 해 가지고 애를 잡을 준비하고 있어요.

애 눈에만 엄마가 안 보이는 것이지...엄마의 시선은 단 1초도 그 아이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어요.


언제까지 예수님, 우리 뒤만 잡고 있어야 됩니까?

우리 발로 걸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놓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놓더라도 그 분의 시선마저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같이 가도.... 이 등신들이 당신을 못 알아보아도....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한 기사는 다 찾아서 설명을 해 주셔요.

이럴 때는 이런이런 얘기가 있었잖아~

그래도 두 제자는 완전히 못 알아보았지요.


성서 설명하면서 하두 속이 상하니까

‘너희들, 참 어리석기도 하다!’


성서에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뜻이 있지요

첫번째,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분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순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서에 ‘너 어리석다!’는 말뜻은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순명하지 않는구나!


성서에 어리석은 짐승, 뭐가 대표적으로 나옵니까?

<당나귀>

그  어리석고 고집 세고 뒷발질하고....

한 번 화나면 주인이 아무리 잡아끌어도 버티고.... 교만의 상징이요,

고집덩어리의 상징인 당나귀를 성지주일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가서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고 고집 센 나를 주님이 쓰시고자 합니다.

주님은 그 고집덩어리 당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에 입성하십니다.

여러분이 이태까지 살면서 주님이 여러분 쓰시겠다고 한 적 여러 번 있었을 거예요.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수녀님의 입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 그럴 때마다

‘저 불러주시고 쓰십시오...능력이 미약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애써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인데... 과연 얼마나 우리는 순명했고

분별력을 가지고 ‘네’ 했고 지혜롭게 대답했던가요.


성서는 머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그토록 성서말씀을 통해 설명을 했건만 못 알아들었습니다.

성서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만 연구하면

성서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죠.


저는 사진을 오래전부터 찍었어요.

사진을 찍을 때, 아무리 렌즈가 좋아도 마음으로 읽고 찍지 않으면 올바른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쁜 카메라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읽으면 메시지가 반드시 담깁니다.


율법학자들은 성서전문가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본당에서 할머니가 까막눈이라 성서를 읽고 싶어도 읽을 재간이 없어요.

너무 너무 성서가 읽고 싶은데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니 성서를 못 읽지요.

이 할머니가 기도를 해보니 지혜가 떠올랐어요.

성당에 오셔서  맨 앞자리에 앉더니 가방에서 종이 세 장을 꺼내셨어요.

빨간 종이, 까만 종이, 세 번째 흰종이...

빨간 종이를 이렇게 들고 눈을 감고 묵상을 하세요.

그 다음에 까만 종이를 들고  묵상을 하세요.

마지막으로 흰 종이를 들고 묵상을 하세요.

본당 신부님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할머니가 ‘이제 맛이 갔나보다!’

조용히 가서 “할머니, 카드 섹션하는 것도 아니고...그것 들고 뭘 하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글을 못 읽습니다...제 나름대로 빨간 종이를 이렇게 쳐다보면

예수님 수고수난이 생각이 나요. 예수님 피 흘리신 ... 까만 종이를 이렇게 보며 죽음을 묵상하고,,,

마지막으로 흰 것은 뭐겠어요?“

흰 것은 부활묵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서학 박사보다도 그 할머니의 묵상이 기가 막힌 거예요.


하느님은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정확하고 또렷하게 드러내주십니다.


미사 때, 사제는 복음을 설명해 주시지요.

물론 재미있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5분을 하더라도 30분보다 길게 느껴지는 강론이 있고

1시간을 떠들어도 5분처럼 빨리 지나가는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반응이 다르겠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설교를 하셔도 조는 인간은 끝까지 좁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못 알아듣습니다.

어리석다는 뜻 세 가지가 뭐라고 했지요?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순명치 않는 자는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코와 귀에 대고 설명을 해 줘도 좁니다.

말씀 불감증 환자는 하느님을 모르지요.


엠마오까지 가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초대해서 같이 빵을 나눕니다.

예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엠마오 제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상징적인 단어는

눈이 가리웠다! 눈이 열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 십자가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이지만...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고독의 수치가 올라갈수록 우리 영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던 인간이 밀려나가면서 그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입니다.

선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어느 누구나 고통을 당하면 외롭고 분명히 인간을 괴롭히는 것인데

남편은 죽고 싶은데....마누라는 옆에서 코를 드르렁~~ 골면

‘아, 나 혼자구나!’

외롭습니다.

고통가운데 혼자가 될 때 하느님을 다른 때보다 쉽게 만나기 때문에

신비스럽고....예수님 볼 수 있다는 걸 겁니다.


두 번째, 우리 눈의 영을 열리게 하는 것은 영적 포기입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쁨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적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행복해 질 겁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입니다.

빵을 떼어 주실 때 그 때 눈이 열렸다.

일일 피정을 시키면 저는 반드시 파견미사를 원합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말씀으로 치유가 알어나지만 결정적으로 빵을 떼어서 나누어 먹을 때,

즉 영성체할 때 완벽한 치유가 일어나요.

그렇기 때문에 피정을 했어도 파견미사 없는 피정은 고무줄 없는 팬티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서서히 치유가 되다가 성체를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

완전한 영과 육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성체성혈 축성할 때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제단 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미사를 미치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온 아이가 팔에 매달리면서

“신부님, 예수님 몸 이렇게 들 때 천사가 날아온 것 봤어?

성모님이 이렇게 팔 벌리고 신부님 끌어안는 것 봤어? ”

‘응, 뒤에서 인기척은 났어!’

못 봤다는 얘기 차마 못 하겠고... ‘참 사람 있었는데 내가 못 봤어..’

애들은 그런 애기 참 많이 했어요.

사제 생활 하면서 그런 이야기 참 많이 들었어요.

영이 맑은 아이들은 봅니다.


성체성혈 축성할 때 이 성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 봅니다.

어떤 아이는 성모님의 옷 색깔을 표현하는데

‘성모님 그 옷 있잖아 ...그 색깔....그 색깔...’

그 아이들이 거짓말 하지 않겠지요.


사제들이 축성할 때는 천사들이 날라 다니면서 성체를 지킵니다.

성모님이 사제를 지킵니다.

축성된 성체 앞에서는 성모님도 무릎을 꿇으십니다.


성체를 정성껏 잘 배령하는 사람은 말씀을 잘 깨닫는 은혜를 같이 받습니다.

빵을 떼어서 먹고 난 후에 제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 줄 아시지요?

‘길에서 그 분이 말씀하실 때 뜨거움을 느꼈어....’

‘맞아..맞아!’

성체를 영하고 난 다음에야 그날 하루 종일 들은 그 피정의 말씀이 완전히 내거가 되는 것이지요.


말씀 밖에 없고 성체가 없는 개신교는 구원의 문 안으로는 들어와 있지만

성체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보증은 없습니다!

성체가 있고 없고.... 천주교와 개신교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개신교신자들의 살면서 그들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지만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예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성체!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이고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서 봉사하는 것이고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서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입니다.


평일미사든 주일미사든 여러분 성체를 모실 때 성체를 통해 치유받으려면

성체를 배령하기 합당한...

적어도 내가 대죄가 있을 때는 하느님과의 다리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무조건 손바닥 내밀고 혓바닥 내민다고 되는 것 아니지요?

대죄상태에 있을 때에는 성체를 영해도 성체가 아닙니다...모령성체입니다.


사제들은 미사 전에 늘 고백소 안에 있습니다.

끊어졌던 하느님과의 다리를 잇고, 오늘 성체를 영하러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마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사를 못 보게 합니다.

보더라도 모고해를 하게끔 유혹을 할 겁니다.

절대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성체는 천상약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뛰어 내려갑니다.

그 다음 날 가는 게 아니지요?

베드로장모가 열병 치유 받고 난 다음에 즉시 일어나서 시중을 들었다.

성령을 체험한자, 말씀을 체험한자, 성체를 체험한 자...

그들의 사전에는 내일이라고 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즉시 곧 치유를 시킨 목적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즉시 일어나서 ...

엠마오 30리길을 내달려 달려갑니다.

30리 길을 갔더니 시몬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실재성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뭐냐?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체험을 통해서 나타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살아가고 있지요!

여러분들이 매달 이곳에 오신다 하더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아무소용도 없습니다.

천국 팔언을 기억합시다...

당신 멋져~~도 기억합시다.

‘당’ - 당당하게

‘신’ - 신나게

‘멋’ - 멋들어지게

‘져’ - 져주면서 살자.

그 다음에 건배


오늘 주신 은혜...치유의 성지, 구마의 성지, 믿음의 성지에 불러주신

성모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오늘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냉담중인 가족 기억하시고.....

앓고 있는 가족 기억하시고....

내 가족만 아니라 내 집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기억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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