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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루살렘과 예수님 [성전 정화 혹은 성전 파괴]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7 조회수433 추천수0 반대(0) 신고

교리서 555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다. 또한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보여 주신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다. 예수님의 수난은 물론 성부의 뜻이며,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를 행하신다.

교리서 55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된 예언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키신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당신 곁에 모으시기 위하여 끈질기게 부르신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마태 23,37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다시 한 번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루카 19,42). 

교리서 559 “영광의 임금님”(시편 24[23],7-10)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즈카 9,9) 당신의 도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표상인 시온의 딸을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 겸손으로 정복하신다. 그러므로 그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린이들과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교리서 586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확실한 거처라고 소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죽음에 처한다는 것은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성전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다. 

<게시자 글 ; 예수님이 계시면 그 곳이 하느님의 나라 참조 ; 가슴 깊은 곳에서 '예수님'하고 부르면 된다. 예수님 안에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부르면 우리는 다름아닌 하느님 나라를 부르는 것이다.>

교리서 59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 “위로부터 태어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 했다. 

교리서 711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9). 여기서 예언의 두 줄기 흐름이 윤곽을 드러낸다. 그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영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희망 중에 “이스라엘의 위로”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루카 2,25.38) 소수의 ‘남은 자들’ 곧 가난한 백성들 안에서 하나로 합해진다.

교리서 1044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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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도성을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당신의 수난과 그 수난에 결합하는 하느님의 백성들(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머무르며 그분의 연민과 희망에 감싸인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예수님 당신 자신이신 성전의 파괴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연민의 눈물이다. 세상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절규로 당신의 '미친 사랑'을 드러내신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눈물'에 일치하여야 한다. 그 눈물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향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 성전 정화는 바로 자기 자신의 정화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강도의 소굴'이 된 자신의 성전을 정화하려면 예수님을 자기 안에 온전히 모셔야 한다. 예수님을 물리치는 종교의 지도자들과 같이 우리 역시 자기 안의 성전이 되시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을 '새해석의 도움으로' 알지 못한다면 이 성전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토서 3, 16 - 17>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오시어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온전하게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자기 안에서 머무르시지 못하게 하는 자기 마음의 완고함 때문이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는다면, 은총을 의문없이 믿는다면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며 자신은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자 노력하게 된다. 자기 안에 모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내면 안에 오셔서 '내 몸의 성전'을 정화시켜 주시며 이 성전을 쇄신시켜 주실 것이다.  

하지만 만일 예수님을 물리치거나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내 몸의 성전'은 예루살렘의 도성처럼 파괴되고 만다. 곧,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한편, 그런 반면에 희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 자신을 위해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 안의 내 마음은 세상 골고타와 다른 또 다른 골고타입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자기 내면의 골고타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결합하는 사람은 또한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같은 '죽음의 신비'에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은 자기 몸의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의탁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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