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3주간 금요일 2011.11.18
매괴 성모님
연중33주간 금요일 (루카19,45-48)
기도의 집
지구회합을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해서 한 식당에 갔습니다. 주인은 자기 집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마당에는 아름답게 은혜의 성모님을 모셔놓았고, 30여명이 앉아 기도할 수 있는 경당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기도의 집에는 제대와 대형십자가, 예수성심상, 성모성심상과 더불어 십사처를 준비해 놓았는데 기도가 절로 될 듯 정성으로 꾸며놓았습니다. 가정에서 기도를 위한 장소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루카19,46)고 나무라셨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빨간 벽돌집으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기 전에 예수님 자신을 말하고 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전을 말할 때는 외적인 건물보다 예수님을 모시는 내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감실 앞에 얼마나 자주 머무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앞에 머물지 않고서는 내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라도 성전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과 비둘기나 양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어디에 살든 일 년에 한번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데 예물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은화로 봉헌해야 했고 비둘기나 양을 각자의 처지대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이용해 먹는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나라 돈은 부정하니 환전을 해야 하는 데 너무도 터무니없이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 생기고, 양이나 비둘기도 성전 밖에서 사온 것은 부적격한 것으로 판결해 성전 안에서 몇 배의 높은 가격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예물을 준비한 정성과 사랑은 헤아리지 않고 부도덕한 상거래를 통해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해 하였습니다. 정말이지 기도하고 찬미하는 성전이 아니라 약자를 등쳐먹는 성전이요, 거룩함은 어디가고 사제 직분을 맡은 사람조차 직분을 이용하여 특권층과 한 통속이 된 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화를 내신 것입니다. 참으로 장엄한 성전은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행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보고 안타까워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성전을 보고 계십니다. 시기 질투와 미움, 욕심으로 사로잡힌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성전에 어찌 거룩함과 장엄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내 마음의 성전을 잘 가꾸기 위해 참 성전이신 주님을 자주 찾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 성경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성전을 거룩하고 장엄하게 만드시길 바랍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당을 잘 가꾸길 기도합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이 마음에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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