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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18일 야곱의 우물- 루카19,45-48 묵상/ 문명의 전환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8 조회수371 추천수4 반대(0) 신고
문명의 전환

그때에 45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의 정의가 실종될 때 강도의 소굴과 똑같아진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 소굴은 종종 정의로운 곳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문명’이라는 착각도 마찬가지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과 세계체제가 근본적인 벽에 부딪혔다고 말한다. 정의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가부장제와 성차별, 인종차별, 인권 경시, 빈부 격차 뿐만 아니라 군비경쟁과 군수 무역, 불공정 무역, 거대 기업의 독점과 횡포다. 또 속도와 팽창만을 앞세우는 경제성장과 행복관이 강도의 소굴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더 잘 보게 된다. 특히 비서구세계에서 이러한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평화를 정의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열매가 우리의 일상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체제를 정의롭게 개조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세계와 문명의 전환은 오늘날 지구촌 정의 구현의 첫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 힘든 여정의 첫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까? 아픔을 아는 사람들, 고통의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공유가 정의구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통해 연대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바로 슬픔이다. 슬퍼하는 마음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없다. 서로 깊이 연관된 세계에서 나 자신이 진정 홀로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슬픔은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슬퍼하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고통은 나눌수록 줄기도 하지만 나눌수록 힘과 자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대훈(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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