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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18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8 조회수28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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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면 신뢰를 잃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적당한 허례가 필요하다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진실은 좋으나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겉으로는 좋은 가치들로 꾸미고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는 것은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처세술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니 이런 부분은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불문율과 같은 것이 현실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의지는 불타고 정의로움은 하늘을 찌릅니다.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치시고 가르침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잘못을 거절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진리의 수호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백 번 들어도 옳고 백 번 보아도 멋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안에서 그렇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눈에 성경 속의 사건들은 당시에 현실이었으나 지금은 그 책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명 진리를 보고, 옳은 것을 보았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이 복음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상황으로 올라가더라도 이런 시각은 지금과 별 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을 세울 때 이미 그 성전의 의미를 풀어준 정의였습니다. 누구도 성전이 기도의 집이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신 현실은 장사치의 집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 사람들은 반성 보다는 예수님의 모습에 더 불만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의 이상과 자신들의 현실이 다르다고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 쫓겨난 장사치들만이 아니라 성전의 의미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그들이 가르친 것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없앨 궁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모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래야 모두가 편히 하느님도 믿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정성으로 마련한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불편하고 거리도 멀고 하니 좋은 제물을 마련해 주는 이들을 따로 만들고 그들 사이의 거래를 편히 할 환전상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싱싱한 제물을 받으시고 바치는 이들은 편안한 걸음으로 성전을 찾을 수 있다고 그 때도 그리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제물은 태워져 바쳐지는 몫을 제외하고는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의 몫으로 주어집니다. 태워 연기로 사라져 흩어지고, 사제의 손에 흔들려 떨어지는 낱알의 상태로 하느님이 사람의 정성을 판단하시겠습니까? 결국 나쁠 것도 없고 그 편이 하느님께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아 본질은 성전 안에 갇히고 현실은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지었다는 성전이 사람들이 먹고 사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하느님은 오히려 그 성전에 갇혀 궤 안에 갇힌 신세가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 궤를 뚫고 나온 정의와 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위협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정도 모르고 혼자서 정의로운 척하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누가 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르다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전에서 홀로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의롭고 멋진 것이 아니라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직자와 스승이 죽이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 갇혀계시지 않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현실에선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 전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순수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이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라는 신앙인들 사이의 '괴담' 속에 위협을 당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강론대에서 복음의 내용이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적용되기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막강한 한계를 이야기하며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이 빈번합니다. 곧 성경이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이란 절대 실천이 불가능한 가치로 만들어 버리고 대신 성경은 어려운 것으로, 그리스도는 따를 수 없는 고귀하고 고결하고 절대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면서 성전은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이치이고 가르침이며 사명인데도 신자가 되는 순간부터 성전 안에서만 신자다운 사람들의 생활이 신앙생활이라 말하는 이상한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갇혀버린 신앙생활 또한 곧잘 세상의 이치를 닮아가는 상황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성전과 성전 밖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지만, 실제는 하느님의 성전도 세상도 모두 세상의 이치대로 흘러가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 말해지는 세상.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크게 잘못이라 생각조차 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외치는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가장 철없고 생각없는 치기로 여겨지고 어리석은 행동이 되어 버리는 상황. 그러나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눈물 속에 담겨 있었던 이스라엘,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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