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1년 11월 2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8 조회수498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1년 11월 20일.

 

마태 25, 31-46.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을 과거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왕으로 와서, 세상 만방을 통치하는 강대국 이스라엘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런 믿음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이 부활하여 살아계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제자들은 그분이 열어놓은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로마 6,4)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새로운 삶을 사는 데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왕의 나라에서 왕이 공포한 법을 지키며 왕이 제시하는 가치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제시한 가치관을 따라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를 왕이라 일컬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몸이다,..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흘릴 피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도 듣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보여주신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없습니다. 국가는 이제 왕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일꾼들을 뽑아 통치하게 합니다. 백성은 왕의 나라에서 황공하게 살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당당하게 삽니다.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들이 몇 있지만, 그 왕은 실제로는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라에는 당연히 왕이 있던 그 옛날에 ‘그리스도 왕’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왕이라는 칭호를 축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가치 질서와 그에 준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최후심판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가치관을 설명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입니다. 한 마디로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당합니다.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보살피며,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런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은 그들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먼저 할 일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형제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그렇게 된 사람들이라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에 의하면, 오늘 복음이 열거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그렇게 된 이들입니다. 따라서 신심 깊은 사람은 그들을 외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불행도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구실만 있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는 굶주리는 자 앞에서, 옷을 잘 입은 사람은 헐벗은 이 앞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이는 잘 지키지 못하는 이 앞에서 우월감을 느낍니다. 예수님 시대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구실로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이들, 곧 ‘이 보잘것없는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것없는 이들은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으로도 봐주지 않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어서 그들은 비로소 동료 인간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김과 보살핌은 예수님이 제시하신 가치 질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는 실천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사람들이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계명과 성사(聖事)에 충실하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면, 재물도 권력도 주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한 비결(秘訣)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당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마르 14,24)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한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 곧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치질서를 우리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신 나라에서는 우리가 받은 은혜로운 것은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면서,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는 연민과 보살핌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이야기는 우리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연민과 보살핌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는 축복의 몸짓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삶은 그런 실천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가치관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고, 존경 받고, 우월감을 갖는 삶이 아니라, 연민과 보살핌을 실천하여 자비하신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 몸짓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법이 아닙니다. 법은 우리 삶의 향기로움을 빼앗아갑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새로운 삶, 향기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