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33주간 금요일 - 임신부처럼
어제 제주도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저는 피곤해서 잠을 잤는데 오는 내내 한 아이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아이 하나 때문에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착하여 함께 탔던 신부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왜 아무도 아이 어머니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지, 혹은 어떤 신부님은 스튜어디스를 불러 말을 하려고까지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는 내내 저를 포함하여 비행기에 탔던 단 한 사람도 그 아이 어머니에게 불만을 이야기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행시간도 짧으니 조금만 참으면 되고, 또 괜히 나섰다가 서로 감정만 상하는 상황이 발생할까봐 모두가 한 아이를 참아내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참았던 것이 잘 했던 것일까요? 저는 약간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저의 비겁함에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상황이 만약 우리의 마음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예수님께서 창으로 당신의 심장이 찢어졌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지성소의 휘장도 함께 찢어졌습니다. 지성소는 하느님께서 계시던 성전 안의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통해 인간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셔서, 이제부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지어놓은 건물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깨끗해진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사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따라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기도’라는 말은 ‘나와 하느님이 만나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전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는 좀처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비행기에서 한 아이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어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산란해지는데,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인 우리 마음 안에 수많은 장사꾼들이 들어있다면 그분과의 대화는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사랑하시는 까닭에 과감히 그 마음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물론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굳게 다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은 당신의 피로써 이룩하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도 그렇지만 우리 안의 성전도 깨끗이 정화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온갖 세상의 걱정들에 휩싸여 살면서 좀처럼 그 분 의견을 물어볼 기회조차 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과연 몇 차례나 내 안의 그 분과 대화하고 있습니까?
그 분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죄’라고 합니다. 베드로처럼 교만하여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바오로처럼 영혼의 눈이 멀어 아나니야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기까지 자신 안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보지도 못할 수 있으며, 당시 성전의 사제들과 지도자들처럼 돈에 정신이 팔려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성전 중의 성전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당신 안에 참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곧바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당신 안에 잉태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태중이 바로 새로운 지성소이고 우리도 그런 순결한 성전을 우리 안에 만들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기가 태중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아기가 그만큼 소중하여 항상 모든 것에 조심한다면 어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렇게 쉽기 잊으며 살 수 있을까요?
내 안에 안 좋은 것이 들어가면 아기에게도 피해가 가고 결국 아기를 잃을 수도 있듯이, 내 마음 안에 잉태해 계신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를 잃는 고통보다 하느님을 잃는 고통이 더 클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폭력까지 사용하시며 당신의 성전을 지키려 하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하며 항상 우리 마음의 성전을 더럽혀 그 분과의 통교를 방해하는 것들을 쓸어버리려는 마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품고 사셨든 성모님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